영국

[영국 런던] 로열 알버트홀

푸른 바다. 2010. 4. 28. 08:00

로얄 알버트홀

 

 

 

 

 

 

로얄 알버트홀

 

영국 런던의 대표적 연주회장으로

1871년 건립 후 영국 예술의 전당 역할을 해왔다.

켄싱턴 가든 남쪽의 앨버트 기념비와 함께 빅토리아 여왕이

부군 앨버트 공의 죽음을 슬퍼해 1871년에 완성한 대극장이다. 

 수용 인원은 약 8500명이며 고대 로마의  콜로세움에 영감을 받아 건축했다고 한다.

콘서트뿐만 아니라 스포츠, 이벤트 행사, 국제회의 등이 열린다.

위치는 하이드 파크 남쪽 켄싱턴가에 있다.

1876년 최초로 권투 시합이 치뤄졌으며,

최근엔 오페라의 유령 25주년 기념 공연도 있었다.

 

 

 

 

<알버트홀 공연 포스터들>

 

빅토리아여왕과 알버트공의 사랑을 담은 공연 포스터.

두사람은 서로 외사촌 관계로 동갑이며, 9남매를 슬하에 두었고

서로 헌신적으로 사랑하며 모범적인 가정생활을 하였다.

알버트공 사후 빅토리아 여왕은 거의 40년을 홀로 살면서

평생 검은 옷을 입고 미망인을 자처하며 앨버트 공의 죽음을 애도했다 한다.

 

 

 

 

 

 

알버트 기념비


 

41세의 나이에 장티푸스로 사망하게 된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 알버트 왕자를 기념하는 기념비이다.

현명하면서도 지적이고 부지런한 알버트공은

영국 공업과 디자인을 발달시킨 사람으로

여왕인 빅토리아에게 많은 힘을 실어주었다 한다.

 

 

 

앨버트 공은 처음에는 외국인(독일인)이라는 이유로

 영국 국민으로부터 외면을 받았지만,

왕실 사람답지 않게 청교도적이고 성실한 삶의 태도는

빅토리아 여왕과 왕실에 그대로 영향을 미쳤고

도덕적이고 청빈한 왕실은 국민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


 

 

 빅토리아 시대의

 조각기술의 화려함과 정교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

 

 

 

 

빅토리아여왕과 알버트공 사진

 

 

 

1837년 6월 20일 빅토리아여왕 대관식

 

조지 3세는 자녀를 15명이나 낳았지만,

맏아들인 섭정공 조지(조지 4세)의 딸 샬럿 공주가 1817년에 죽자

조지 3세의 직계손 가운데 생존자는 한 사람도 없게 되었다.

그래서 왕위 계승자를 얻기 위해

 섭정공의 아우인 클래런스·켄트·케임브리지 공작 등 세 사람이 1818년에 결혼했다.

다음 번 영국 군주의 아버지가 되기 위한 이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은

 조지 3세의 넷째 아들인 켄트 공작 에드워드였다.

에드워드가 낳은 외동딸은 알렉산드리나 빅토리아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에드워드가 죽고 1820년에 조지 4세가 왕위에 오른 뒤,

빅토리아의 왕위 계승 서열은 요크 공작과 클래런스 공작(윌리엄 4세)에 이어 3번째가 되었다.

1837년 6월 20일 새벽, 윌리엄 4세가 죽자, 빅토리아가 그 뒤를 이었다.

 방년 18세인 처녀의 즉위는 낭만적인 인기를 끌었다

 

 

 

 

 빅토리아 여왕은

 외사촌인 알버트 공의 잘생긴 외모에 매혹된지 3년후,

 그가 영국 왕실을 재방문하러 윈저에 도착한 지

불과 5일 뒤인 1839년 10월 15일에 그에게 청혼했다.

그리고 이듬해 1840년 2월 10일 제임스궁의 왕실예배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알버트공은

여왕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었는데,

 여왕은 모든 일에서 남편에게 의지했고

또 그에게서 왕실 통치의 요체와 궁중 생활의 미덕을 배웠다.

곧이어 9명의 자녀들이 잇따라 태어났다.

 

 

 

 

 

 

 

 

알버트는

독일 코부르크 인근의 로제나우 성에서 1819년 8월 26일 태어났다.

외사촌인 빅토리아여왕은 같은 해 5월 24일에 태어났다.

빅토리아가 태어날 때에 산파였던 여인이

알버트가 태어날 때에도 산파를 맡아 한 것은 또 다른 인연이었다.

알버트의 아버지는 작세-코부르크-잘펠트 공작인 에르네스트3세이며

 어머니는 그의 첫째 부인인 작세-고타-알텐부르크의 루이제공주였다.

 

 

                                   결혼식 직후의 알버트공

 

 

빅토리아여왕의 자녀와 손자 손녀들

 

빅토리아 여왕은 1840년에 제1왕녀 빅토리아 공주를 낳았는데,

빅토리아 공주는 1858년에 프로이센 왕세자(프리드리히 3세)와 결혼하여

훗날의 독일제국 카이저(황제)인 빌헬름 2세의 모후가 되었다.

웨일즈 공 에드워드(나중에 에드워드 7세)는 1841년에 태어났다.

 1843년에는 헤센 대공비가 된 앨리스 공주가 태어났고,

1844년에는 뒤에 에든버러 공이자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이 된 앨프레드 왕자가 태어났으며,

1846년에는 헬레나 공주(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제후인 크리스티안의 아내),

1848년에는 루이즈 공주(아가일 공작부인), 1850년에는 아서 왕자(코노트 공작),

1853년에는 레오폴드 왕자(올버니 공작),

 그리고 1857년에는 비트리스 공주(바텐베르크의 제후인 하인리히의 아내)가 태어났다.

여왕의 첫 손자는 1859년에 태어났고, 첫 증손자는 1879년에 태어났다.

여왕이 죽었을 때, 살아 있는 증손자는 37명이나 되었다.

 

 

노후의 빅토리아여왕

 

빅토리아 여왕은 잠시 병을 앓다가,

1901년 1월 22일에 오즈번에서 고통없이 세상을 떠났다.

헨리 제임스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 우리는 모두 어머니를 잃은 듯한 기분을 느끼고 있다.

신비로운 빅토리아가 죽고, 평범한  에드워드가 왕이 되었다."

빅토리아 여왕은 윈저 궁 근처의

 프로그모어에 있는 영묘에 앨버트 공과 나란히 묻혔다.

빅토리아 여왕의 업적은 단순했다.

영국 역사상 가장 긴 통치를 한 빅토리아는 영국 국왕이 잃어버렸던 위엄과 인기를 되찾았다.

여왕의 정치적 통찰력과 정치적 중요성 및

입헌군주로서의 역할에 대한 평가는 역사가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여왕의 높은 의무감과 꾸밈 없는 정직함과 소박함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빅토리아여왕의 대관식 왕관

 

 보석들

 

 

 

 

빅토리아여왕 기념주화

 

빅토리아여왕이 쓰던 은식기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