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누스 개선문, 콜로세움
유네스코는 1980년 로마의 유적 지구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고,
이후 1990년 보존 지역을 교황 우르바노 8세가 쌓은 성벽 안쪽까지 넓혀서 지정했다.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서기 312년 막센티우스와 겨룬 전쟁에서 승리하여 서로마를 통일한 것을 기념하여
로마 원로원과 시민들이 서기 315년에 세운 것으로 오늘날까지 거의 완벽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이 개선문은 로마시대의 개선문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며,
높이 28m, 길이 25m의 코린트 양식 기둥 건물에 크고 작은 3개의 아치 모양 문이 있다.
우리나라의 독립문을 비롯하여, 인도 델리의 인디아 게이트 등은 모두 파리의 개선문을 모방한 것인데,
파리 개선문의 원조가 된 것이 바로 이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선문이다.
전투에서 크게 승리한 고대 로마의 장군들은
콜로세움(우측) 옆에 있는 이 개선문을 지나 포로 로마노(왼쪽에 보이는 유적)로 개선하였다.
콘스탄티누스는 310년 경부터 태양신을 숭배하고 있었는데,
그의 부친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에 대하여 관대하였다.
콘스탄티누스는 황제자리를 놓고 막시미아누스의 아들 막센티우스와 격전을 벌이기 위하여 로마로 향한다.
그런데 진군중 대낮에 십자가와 더불어 하늘에 이것으로 이기리라는 문구가 나타났다.
이 광경을 그의 군대도 함께 보았다. 그리고 그날 밤 꿈에도 똑같은 광경을 보았다.
신의 계시를 받은 콘스탄티누스는 십자가 군기를 앞세우고 테베레 강의 빌비오 다리에서 결전을 벌였는데,
막센티우스는 이 전투에서 대패하여 강에 떨어져 죽었다.
원로원과 로마시민의 환영을 받으며 입성한 콘스탄티누스는 다음해에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여 기독교를 공인하였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22년 후 사망하기 직전에 세례를 받았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즉위 10년을 앞두고 2년 안에 개선문을 만들려고 하니 시간이 부족하여
다른 건축물에 있던 것을 떼어다 붙여 만든, 로마의 개선문중 가장 큰 개선문이다.
제일 위 4개 석상은 트라야누스 황제 공회장에서 떼어다 붙이고,
석상 2 개 사이 네모난 부조는 마르크 사우레네스 황제가 만든 개선문에서 떼어다 붙이고,
동그란 부조 4개는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만든 개선문에서 떼어다 붙이고,
동그란 부조 아래 양쪽 옆으로 길고 네모나게 만든 부조에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전쟁 내용을 새겨 넣었다.
본래 개선문 뒤로는 분수가 있었는데
파시즘 시대에 무솔리니가 이동할 때 이 개선문 가운데로 이동할려고하니 앞 모양새는 좋은데
개선문을 나가자마자 바로 있는 분수로 인해 돌아가게 되니
나가는 모양새가 안 좋아 분수를 없앴다고 한다.
콜로세움
정식 명칭은 플라비우스 원형경기장이라고 한다.
비공식 이름이었던 콜로세움의 유래에 대해서는 원형 경기장 근처에 있던
네로 황제의 거대한 청동상과 명칭이 혼동되었다는 설과
거대하다는 뜻의 이탈리아어 콜로살레와 어원이 같다는 설이 있다.
콜로세움은 네로 황제가 화재 사건으로 자살하자
그 다음 황제인 플라비우스 왕조의 베스파시아누스황제가
로마 시민들을 달랠 목적으로
AD 72년에 네로 황제의 궁전 도무스 아우레아(황금 궁전)에서 내려다 보이던
연못에다가 물을 퍼내고 흙을 채워 타원형의 대리석 건물을 짓고,
건물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대리석에 홈을 파고 쇠심을 넣는,
8년의 공사기간을 거쳐 AD 80년 그의 아들 티투스 황제 때에 완성되었다.
지붕은 천막을 쳐서 광선과 환기 되게 하였고, 수많은 군중들의 고함소리가 울리지 않게 하였다.
그는 이 경기장을 짓고 난 뒤 기념 축하 파티만 100일을 했으며,
그 축하 파티때 경기에 쓰여 죽은 맹수만 9,000 마리가 넘으며 검투사 2,000여명이 희생되었다.
그 뒤에도 틈만 나면 여러 경기를 열어 고급 사교장과 유흥장으로 만들었는데,그것은 자신의 정권유지를 위한 방편이었다고 한다.
대형 원형경기장이었던 콜로세움은 고대 로마인들의 뛰어난 건축공학 기술이 남긴 뛰어난 건축물이다.
콜로세움은 라틴어로 거대한 건축물이란 뜻이다.
당시의 건축기술로 이렇게 큰 건축물을 8년만에 지었다는 사실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라고 한다.
콜로세움은 5만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타원형 건축물로, 장축 지름이 187m 단축 지름 156m이며, 둘레가 527m,
높이 57m의 4층 규모인데 지금은 많이 허물어져 2층이나 3층만 남아 있는 부분이 더 많다.
1층은 도리아식 아치와 대리석으로 좌석이 마련된 귀빈석이며,
2층은 이오니아식 아치와 목재로 만든 서민석이며 , 3층은 코린트식의 아치가 있는 노예들의 입석이며,
4층은 아케이드가 없는 코린트식 반각기둥으로 되어 있다.
콜로세움은 햇빛이 강할 때나 비가 올 때는 벨라리움이라고 하는 천막을 쳐서 하늘을 가렸는데,
아치 80개에 천막 240개, 해군을 상주시켜 천막을 치고 걷게 하였다 한다.
콜로세움은 총 4층으로 되어있고 아치가 있는게 3개층, 아치가 없는게 1개층이다.
8만명이 들어갈 수 있는 규모로 앉아서 볼 수 있는 좌석이 5만명, 서서 구경하는 사람이 3만명,
이는 로마시대 사람 엉덩이 사이즈 40cm를 기준으로 계산하였다 한다.
이 8만명을 해산시키는데 걸리는 시간은 단 15분.
그 이유는 맨 아래층 아치 80개가 출입구로 사용 되었는데,
무료인 관람 티켓에 자신이 들어가고 나올 문의 번호가 써 있었기 때문이라 한다.
중심축으로 통하는 4개의 문은 황제, 고위관리,불의 여신 베스타의 여사제들,사제들이 사용하고
나머지 76개의 문은 일반인이 사용하였다.
콜로세움 내부 사진 출처 네이버 백과 사전
이포제움(지하실)이라고 불리는 콜로세움 바닥 밑의 터널은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절에
만든것으로 추정 되는데 터널 위를 두꺼운 판자로 완전히 덮은 다음 모래로 덮었다.
지하 2층까지 있었고 동물들의 우리, 검투사들의 대기실등이 있었는데 거의 80군데 입구를 통해
밑에서 위로 바로 올라가는 승강기를 사용하여 갑자기 야생 동물들이 나타나게 만들어 놓았다.
또한 황제나 사제들이 동물이나 검투사들을 군중을 지나치지 않고 바로 내려가
가까이서 구경하는 시설까지 만들어 놓았다.
경기 종류로는 검투사끼리 벌이는 글라디아토르 격투와
야생동물 사냥이라 할 수 있는 베네이션이 있는데
베네이션은 주로 오전에, 글라디아토르 격투는 오후에 벌어졌다.
선명하게 보이는 기둥의 홈은 쇠심으로 대리석을 연결하기 위해서 판 것이다.
콜로세움이 2천년 동안 무너지지 않은 까닭은
기둥에 홈을 파서 쇠심을 넣어 대리석을 서로 연결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며,
아치형 건물로 만들었기 때문에 지진을 이겨냈다고 건축가들은 이야기 한다.
콜로세움의 모든 기둥과 외벽은 대리석으로 장식돼 있었지만
AD 442년에 대지진이 일어나 일부가 파괴되고, AD 465년 서로마의 멸망으로 방치되어 오랜 세월동안
귀족과 주변 주민들이 건축 자제로 대리석을 빼간 탓에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한다.
당시 전쟁에서 돌아온 농민들은 성격이 거칠어져 고향으로 돌아가 일하는 대신
로마에 머물며 원형경기장의 검투사 시합 등을 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