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로마]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콜로세움,베네치아 광장

푸른 바다. 2010. 5. 9. 16:17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콜로세움

 

 

 

유네스코는 1980년 로마의 유적 지구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고,

이후 1990년 보존 지역을 교황 우르바노 8세가 쌓은 성벽 안쪽까지 넓혀서 지정했다.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서기 312년 막센티우스와 겨룬 전쟁에서 승리하여 서로마를 통일한 것을 기념하여

로마 원로원과 시민들이 서기 315년에 세운 것으로 오늘날까지 거의 완벽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이 개선문은 로마시대의 개선문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며,

높이 28m, 길이 25m의 코린트 양식 기둥 건물에 크고 작은 3개의 아치 모양 문이 있다.

우리나라의 독립문을 비롯하여, 인도 델리의 인디아 게이트 등은 모두 파리의 개선문을 모방한 것인데,

파리 개선문의 원조가 된 것이 바로 이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선문이다.

전투에서 크게 승리한 고대 로마의 장군들은

콜로세움(우측) 옆에 있는 이 개선문을 지나 포로 로마노(왼쪽에 보이는 유적)로 개선하였다.

 

 

콘스탄티누스는 310년 경부터 태양신을 숭배하고 있었는데,

그의 부친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에 대하여 관대하였다.

콘스탄티누스는 황제자리를 놓고 막시미아누스의 아들 막센티우스와 격전을 벌이기 위하여 로마로 향한다.

그런데 진군중 대낮에 십자가와 더불어 하늘에  이것으로 이기리라는 문구가 나타났다.

 이 광경을 그의 군대도 함께 보았다. 그리고 그날 밤 꿈에도 똑같은 광경을 보았다.

 신의 계시를 받은 콘스탄티누스는 십자가 군기를 앞세우고 테베레 강의 빌비오 다리에서 결전을 벌였는데,

막센티우스는 이 전투에서 대패하여 강에 떨어져 죽었다.

원로원과 로마시민의 환영을 받으며 입성한 콘스탄티누스는 다음해에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여 기독교를 공인하였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22년 후 사망하기 직전에 세례를 받았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즉위 10년을 앞두고  2년 안에 개선문을 만들려고 하니 시간이 부족하여

다른 건축물에 있던 것을 떼어다  붙여 만든, 로마의 개선문중 가장 큰 개선문이다.

제일 위 4개 석상은 트라야누스 황제 공회장에서 떼어다 붙이고,

석상 2 개 사이 네모난 부조는 마르크 사우레네스 황제가 만든 개선문에서 떼어다 붙이고,

동그란 부조 4개는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만든 개선문에서 떼어다 붙이고,

동그란 부조 아래 양쪽 옆으로 길고 네모나게 만든 부조에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전쟁 내용을 새겨 넣었다.

본래 개선문 뒤로는 분수가 있었는데

파시즘 시대에 무솔리니가 이동할 때 이 개선문 가운데로 이동할려고하니 앞 모양새는 좋은데

개선문을 나가자마자 바로 있는 분수로 인해 돌아가게 되니

 나가는 모양새가 안 좋아 분수를 없앴다고 한다.

 

콜로세움

 

정식 명칭은 플라비우스 원형경기장이라고 한다.

 비공식 이름이었던 콜로세움의 유래에 대해서는 원형 경기장 근처에 있던

네로 황제의 거대한 청동상과 명칭이 혼동되었다는 설과 

거대하다는 뜻의 이탈리아어 콜로살레와 어원이 같다는 설이 있다.

 

 

 콜로세움은 네로 황제가 화재 사건으로 자살하자

그 다음 황제인 플라비우스 왕조의 베스파시아누스황제가

로마 시민들을 달랠 목적으로

AD 72년에 네로 황제의 궁전 도무스 아우레아(황금 궁전)에서 내려다 보이던 

연못에다가 물을 퍼내고 흙을 채워 타원형의 대리석 건물을 짓고,

   건물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대리석에 홈을 파고 쇠심을 넣는,

8년의 공사기간을 거쳐 AD 80년 그의 아들 티투스 황제 때에 완성되었다. 

지붕은 천막을 쳐서 광선과 환기 되게 하였고, 수많은 군중들의 고함소리가 울리지 않게 하였다.

그는 이 경기장을 짓고 난 뒤 기념 축하 파티만 100일을 했으며,

그 축하 파티때  경기에 쓰여 죽은 맹수만 9,000 마리가 넘으며 검투사 2,000여명이 희생되었다.

그 뒤에도 틈만 나면  여러 경기를 열어 고급 사교장과 유흥장으로 만들었는데,그것은 자신의 정권유지를 위한 방편이었다고 한다.

 

 

대형 원형경기장이었던 콜로세움은 고대 로마인들의 뛰어난 건축공학 기술이 남긴 뛰어난 건축물이다.

콜로세움은 라틴어로 거대한 건축물이란 뜻이다.

당시의 건축기술로 이렇게 큰 건축물을 8년만에 지었다는 사실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라고 한다.

콜로세움은  5만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타원형 건축물로, 장축 지름이 187m 단축 지름 156m이며, 둘레가 527m,

높이 57m의 4층 규모인데 지금은 많이 허물어져 2층이나 3층만 남아 있는 부분이 더 많다.

 1층은 도리아식 아치와  대리석으로 좌석이 마련된 귀빈석이며,

2층은 이오니아식 아치와 목재로 만든 서민석이며 , 3층은 코린트식의 아치가 있는 노예들의 입석이며,

 4층은 아케이드가 없는 코린트식 반각기둥으로 되어 있다. 

콜로세움은 햇빛이 강할 때나 비가 올 때는 벨라리움이라고 하는 천막을 쳐서 하늘을 가렸는데,

아치 80개에 천막 240개, 해군을 상주시켜 천막을 치고 걷게 하였다 한다.

  

 

콜로세움은 총 4층으로 되어있고 아치가 있는게 3개층, 아치가 없는게 1개층이다.

8만명이 들어갈 수 있는 규모로 앉아서 볼 수 있는 좌석이 5만명, 서서 구경하는 사람이 3만명,

이는 로마시대 사람 엉덩이 사이즈 40cm를 기준으로 계산하였다 한다. 

이 8만명을 해산시키는데 걸리는 시간은 단 15분.

그 이유는 맨 아래층 아치 80개가 출입구로 사용 되었는데,

무료인 관람 티켓에 자신이 들어가고 나올 문의 번호가 써 있었기 때문이라 한다.

중심축으로 통하는 4개의 문은 황제, 고위관리,불의 여신 베스타의 여사제들,사제들이 사용하고

나머지 76개의 문은 일반인이 사용하였다.

 

콜로세움 내부  사진 출처  네이버 백과 사전

 

이포제움(지하실)이라고 불리는 콜로세움 바닥 밑의 터널은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절에

만든것으로 추정 되는데 터널 위를 두꺼운 판자로 완전히 덮은 다음 모래로 덮었다.

지하 2층까지 있었고 동물들의 우리, 검투사들의 대기실등이 있었는데 거의 80군데 입구를 통해

밑에서 위로 바로 올라가는 승강기를 사용하여 갑자기 야생 동물들이 나타나게 만들어 놓았다.

또한 황제나 사제들이 동물이나 검투사들을 군중을 지나치지 않고 바로 내려가

가까이서 구경하는 시설까지 만들어 놓았다.

 

경기 종류로는 검투사끼리 벌이는 글라디아토르 격투와

 야생동물 사냥이라 할 수 있는 베네이션이 있는데

베네이션은 주로 오전에, 글라디아토르 격투는 오후에 벌어졌다.

 

선명하게 보이는 기둥의 홈은 쇠심으로 대리석을 연결하기 위해서 판 것이다.

 

콜로세움이 2천년 동안 무너지지 않은 까닭은

기둥에 홈을 파서 쇠심을 넣어 대리석을 서로 연결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며, 

아치형 건물로 만들었기 때문에 지진을 이겨냈다고 건축가들은 이야기 한다. 

 

콜로세움의 모든 기둥과 외벽은 대리석으로 장식돼 있었지만

AD 442년에 대지진이 일어나 일부가 파괴되고, AD 465년 서로마의 멸망으로 방치되어 오랜 세월동안

귀족과 주변 주민들이 건축 자제로 대리석을 빼간 탓에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한다.

 

 

 

당시 전쟁에서 돌아온 농민들은 성격이 거칠어져 고향으로 돌아가 일하는 대신

로마에 머물며 원형경기장의 검투사 시합 등을 즐겼다.

일대 일로 겨루는 검투사 시합은 그 잔혹함 때문에  인기도 있었지만

로마 군인들에게 강인한 정신을 불어 넣기 위하여 시작한 것이었다.

나중에는 전문 검투사를 양성하게 되었고

프로 검투사의 인기는 날로 치솟았으며 검투 경기는 점점 잔인해 졌다.

그러자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부터는 검투 경기를 금지시키려고 노력했으나

이 경기에 대한 로마인들의 열광은 막을 수 없었다.

한때는 엉뚱하게도 기독교인들에게 그 화가 닥치기도 하였다.

도미티우스 황제는 자신에 대한 시민들의 증오감을 기독교인들 한테로 돌리기 위하여 신앙심 깊은 교인들을

 이 경기장에서 맹수의 밥으로 던져 넣었던 것이다.

훗날 이곳에서 희생된 기독교인들을 위해서 관중석의 한 곳에는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계속되던 검투 경기는 5세기 초반 한 수도사가 검투 시합 도중 경기장으로 뛰어내려 중단을 호소하다가 흥분한

 군중들의 돌에 맞아 죽은 후 경기가 중단 되었다.

그 후 콜로세움은 이민족들의 침입과 지진 등으로 파괴되어 채석장으로 변했다.

  

 

4층으로 보이는 부분은 원래의 모습이며, 많은 부분은 파손되었다.

기본 구조물은 그대로 있고 외벽3/5이 없어지고 2/5는 남아있다.

 

2천 년의 세월을 견디며 자연재해와 전쟁의 위험을 피한 로마의 유적들은

최근 수 십년 사이에 급속하게 이루어진 도시화와 환경 오염으로 고통 받고 있다.

자동차 배기가스와 대기 오염은 건축물과 조각품들을 손상시키고 있으며

지하철 공사 등으로 몇몇 유적은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 한다.

 

이탈리아 유적을 상업적 브랜드 가치로 환산했더니

콜로세움이 91억유로(약 1조5천억원)로 1위라 하는데 이는

세계 최고라는 코카콜라 브랜드 가치의 두 배라 한다.

이어서 밀라노 두오모 성당이 82억유로, 로마 트레비분수가 78억유로라 한다.

 

 콜로세움의 모델이 된 마르첼로 극장.

 

 콜로세움과 혼동하기 쉬운 이 건축물은 로마시대 축조된 극장 중 현재까지 전해 내려오는 유일한 극장이다.

 각 층당 41개의 아치로 장식되어진 2층 건물로서 내부는 약 12,000명을 수용하도록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 극장은 줄리어스 시저가 착공을 해서 BC 11년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완성하여

조카이자 사위인 마르셀루스에게 주었다고 전해진다.

원래는 도리아 양식과 이오니아 양식으로 41개의 아케이드를 세우고, 그 위에는 코린트 양식을 적용하였다고 한다.

외관은 언듯보기에 콜로세움과 비슷하게 생겼으며, 콜로세움과 마찬가지로 중세에는 요새로 사용되다가,

 세벨리와 오르시니의 궁전으로 개조되었다.

지금은 2층의 아치만 당시의 건물이고, 위는 르네상스 후기의 건물.

  

이탈리아를 통일한 이탈리아 초대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2세의 기념관 

 

이탈리아는 5세기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뒤 근대에 이르기까지 도시국가로 분열돼 있다가

1861년 에마누엘레 2세가 자신의 사보이왕국을 중심으로 이탈리아 왕국을 선포한 뒤

가리말디 장군과 함께 1870년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한다.

 통일을 달성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위업을 기념하기 위해

 1885년 건축가 쥬세페 사코니의 설계로 25년 뒤 1911년 완공된

네오클래식 양식으로 16개의 원기둥이 활 모양을 그리는 콜로나데로 만들어 졌다.

 건물 제일 높은 층의 상부에는 이탈리아 주요 도시의 상징이 있고

양측에 위치한 커다란 2개의 문 위에는 4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가 있다.

계단 양 끝에 분수가 있는데 오른 쪽이 “티레니아 해” 왼 쪽이 “아드리아 해”를 나타낸다.

중앙의 기마상은 이태리 통일을 이룩한 비토리오 에마누엘 2세의 동상이다.

 

 

16개의 원주가 받치고 있는 반원형의 건물 상단에는

청동으로 만든 4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가 있는데,

오른쪽이 조국애와 승리, 왼쪽이 노동의 승리를 나타내는 것이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2세의 기념관 

 

기념관 건물과 조국의 계단이라 불리는 계단,

거대한 에마누엘레의 기마상, 전차에 탄 두 빅토리아 여신상 등 모두 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기념관 아래층은 '이탈리아 통일 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이 박물관은 1차 세계대전 때 숨진 무명용사들의 묘와 통일운동에 관한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기념관 중앙의 계단 위에는 1921년에 만든 제 1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묘가 있다.

 기념관을 장식한 조각품들은 1935년에야 완성되었다.

 

가운데 기마상 밑에 화환과 병사 두 명이 보인다.

 

두명의 병사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을 지키고 있다.

 

 

 이 기념관은 외형상 일명 웨딩 케이크라고도 한다. 

 

로마 사람들이 싫어해서 붙인 별명이 웨딩 케잌이라 하는데 이는

가운데 잔디 광장인 베네치아 광장을 중심으로 베네치아 궁전과 르네상스 시대의 건축물과 성당,

그리고 로마의 유적지가 잘 조화를 이룬 경관이었는데 

하얀 통일기념관이 만들어져 부조화스럽게 되어서란다.

 

기념관을 지을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카피톨리누스 언덕(고대 로마 시대에 주피터 신전이 있던 언덕)의 일부와

중세풍 동네 하나가 완전히 철거당했기 때문에, 처음 세워지던 시기에도 논란의 대상이었다 한다.

그럼에도 이 건물은 이탈리아 역사 속의 중요한 순간에 바치는 찬사이며, 많은 관광객들을 이끌고 있다.

 

 

통일 할 때 중요한 역할을 했던 도시마다  세워진 기마상은

이탈리아 14개 도시에 똑같은 기마상이 있게 된 이유이다.

이 기마상을 받치고 있는 기단에는 이탈리아 주요 도시들을 상징하는 부조물이 있다.

 

베네치아 광장

 

베네치아 광장은 로마 교통의 중심지로 6개의 주요 도로가 사방으로 뻗어 있으며,

코르소 거리의 남쪽 끝에 있다.

광장 정면에 에마누엘레 2세 통일기념관이 있고, 왼쪽에는 베네치아 궁전이 있다.

 

 

베네치아궁전

 

베네치아공화국이 번영하던 시절, 베네치아 대사관으로 쓰이던 건물로,

 15세기경에 지어졌으며 2층은 무솔리니가  집무하던 집무실이 있고,

  발코니는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무솔리니가 이 곳 2층 발코니에서 군중들에게 연설한 것으로 유명하다.

현재는 공예품을 모아 놓은 박물관과 도서관으로 쓰이고 있다.

 

베네치아 광장 근처에 세워진 트라야누스 원기둥

 

트라야누스 황제는 스페인 출신(최초의 속주 출신)의 황제로, 로마 제국의 국경을 최대로 확장한 황제다. 

 

티투스의 동생이자 콜로세움을 완성시켰던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피살된 후,

 원로의원인 노인 네르바가 황제로 추대된다.

그는 1년 6개월동안 재위했으며, 죽기 전 능력만 보고 트라야누스 장군을 양자로 삼아 후계자로 지명했다.

트라야누스는 당시 다키아와 경계를 이루는 도나우강 방어선에서 활동중이었는데,

재위를 물려받은 후에도 방어선을 떠나지 않고 점검한 뒤, 2년 뒤에야 로마로 돌아온다.

로마로 돌아올 때도 호위병 하나 없이 시민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거들먹거리지 않고 겸허하게 입성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황제가 된 이후에 다키아는 로마와의 협정을 깨버리고 군사력을 증가시키며 트라야누스가 아끼던 장군을 죽이는등 도발을 한다.

 결국 트라야누스는 군대를 이끌고 다키아에 침공한다. 원정 전쟁은 일방적이었고, 다키아를 점령한 이후,

그는 다키아로 로마인들을 이주시켜 완전 로마화시켰는데, 그 땅이 바로 지금의 루마니아(로마인들의 나라)다. 

트라야누스 황제는 그 이후에도 로마 영토 확장에 힘을 썼는데,

 최후의 원정 전쟁이던 파르티아 원정 도중 병을 얻고, 총사령관에 하드리아누스를 임명한 뒤 로마로 돌아오던 중 사망한다. 


그의 유골함은 원기둥 기단에 안치되었으며, 원기둥 꼭대기에는 트라야누스 청동상이 세워졌다.

이 청동상은 르네상스 시대에 천국의 열쇠를 쥐고 있는 베드로의 청동상으로 바뀌어 졌고

베드로상은 바티칸 언덕을 향해 서있다. 


트라야누스 원기둥에는 다키아 전쟁 기록이 남아있는데,

중간 지점에서 승리의 여신 빅토리아가 1, 2차 다키아 원정을 구분하고 있다. 

 

 원기둥과 트라야누스 포룸 옆에 세워진 트라야누스 시장터


고대 로마의 쇼핑몰로, 로마에 남아있는 실용적 용도의 건축물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유적이다. 

역사학자들은 좌우대칭이 진리였던 시대에 지어진

이 건축물이 비대칭적이고 자유로운 형태를 갖췄으며 실용적인 기능이 강조됐다는 점에 큰 의의를 둔다.

시장터에서 가장 높은 지점은 트라야누스 원기둥 높이와 일치하기 때문에, 원래 언덕 높이가 저 정도였다고 추측할 수 있다.

언덕을 깎아냈다곤 해도 계단식으로 경사를 두고 깎은 것이기 때문에,

이 시장터 역시 경사진 땅을 최대한 활용하는 쪽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트라야누스 시장터는 모두 6층으로

로비에서는 꽃과 과일을 팔았고, 1층에는 음료를 보관했다.

2, 3층에는 동방의 향수, 향신료를 판매하는 장소와 술집이 있었으며,

 4층의 큰 홀에는 서민들에게 보급할 식량을 저장해 두었다.

꼭대기 층에선 생선을 팔았는데, 수로를 따라 흐르는 물로 생선을 신선하게 보관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