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북경] 이화원

푸른 바다. 2009. 12. 19. 15:00

이화원

 

 

북경여행 3일째인 12월 12일 토요일은 호텔 조식후

1998년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그 유명한 서태후의 이화원을 둘러보았다.

 

 

이화원 동궁문 - 인수전 - 지춘정 - 낙수당 - 장랑

페키지 여행의 한계로 일부분만 보았다.

 

중국 최대의 황실 정원으로 일컬어지는 이화원은 베이징 중심부에서

 북서쪽으로 약 16km 거리에 있으며 총면적이 290헥타르에 이르는 광대한 공원이다.

1764년에 청 건륭제가 청조의 별궁으로 지으면서 청의원이라 고치고 , 1860년에 제2차 아편전쟁으로 황폐화되었다.

그 뒤 1888년에 서태후가 해군예산 30만 은을 유용하여 다시 대대적으로 정비하여 지금의 모습이 되었으며,

1998년에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출처: 테마백과)

 

청 도광이후 국세가 약해지면서 청의원은 점차 방치되기 시작하였고,

함풍 10년(1860) 제2차 아편전쟁시 텐진조약의 비준을 강요하는 영불연합군 8만이

베이징 서쪽 교외의 원명원을 불태웠을때 이곳도 약탈당하고 불태워졌다.

광서 10년에서 11년(1884~1895) 자희태후(서태후)가 은퇴하며 이곳에 머물자

광서제는 다시 청의원을 중건토록 하고 건축군을 복원하며

쿤밍호 주위 사방에 담장을 쌓고 이허위안(이화원)으로 개칭하여 궁궐로 삼았다.

 광서 26년(1900) 원내 건축 및 문물은 8국연합군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2년후 다시 복구되었다.

 

인수전

이화원 동궁문을 들어서면 광서제와 서태후가 집무를 보던 궁궐 건물인 인수전이 있다.

원래의 이름은 근정전으로, 1860년에 소실된 후 광서제때 재건되면서 인수전이라 개칭하였는데,

어진 정치를 베푸는 자는 장수한다는 뜻이다.

인수전은 휴식을 취하던 공간이 아니라

외국사신 접견 등 공적인 업무를 수행하던 공간으로 화려하지는 않다.

 

 

인수전 앞 물항아리와 용과 봉황에는 天地一家春 (천지일가춘)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함풍황제가 세상에서 서태후가 가장 아름답다는 의미로 하사한 것인데,

서태후가 이를 기념하여 새겨 놓은 것이다.

이는 서태후의 수유기간에 함풍제가 네명의 미인을 사랑하였는데

이에 서태후가 심한 질투로 소동을 일으키자

함풍제가 이를 무마시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물한 것이라 한다.

 

 황룡과 봉황상

인수전 앞에는 궁궐 건물들 처럼 청동으로 만든 중국 신화속의 동물인

황룡,봉황,기린상과 정원을 꾸미는 화려한 원림치석(수석)을 전시해 놓고 있다.

 

전설의 동물 기린상 

  오색 찬란 화려한 빛깔의 털을 가지고 이마에는 기다란 뿔이 하나 있는 외뿔잡이 동물이다.

사슴의 몸에 소의 꼬리, 말과 비슷한 발굽과 갈기를 갖고 있다고 알려진 상상 속의 동물이다.

예로부터 용, 거북, 봉황과 함께 사영수(四靈獸)를 이루어, 신성한 동물로 인식되었다. (출처:네이버캐스트)

 

인수전 앞 봉황과 황룡상

보통 궁궐이라면 대부분 문쪽에 황제를 상징하는 용을, 그옆에 황후를 상징하는 봉황을 놓기 마련인데

이곳 이화원 그중에서도 정무를 보살피던 인수전 앞에 위치가 바뀌어져 있는 것은

서태후가 청나라의 실권은 황제가 아니라 나라는 사실을

이곳에 오는 관료나 사신에게 보이기 위해서이다.

 

앉아서 정무를 보던 곳

 

 

이화원 인수전을 보고 곤명호수로 나가는 길에 보이는 문창각

건륭제때 문운이 높아지길 기원하는 뜻에서 학문의 신인 문창제군에게 봉헌된 건물이다.

 

멀리 지춘정 입구에 높이 16m의 문창각이 보인다.

 

이화원 정문에서 인수전을 통해

처음으로 곤명호수를  볼 수 있는 장소에 문창각과 여러 건물들이 있다.

 

 곤명호수 동쪽의 이화원에서 맨처음 봄을 맞이 한다는 지춘정

 

수양버들이 있는 작은 두개의 섬으로 입구에 있는 인수전을 통해서 들어 올 수 있다.

문창각에서 다리를 건너면 지춘정이 있다.

지춘정이 있는 작은 섬에는 많은 수양버드나무가 있으며,

지춘정 주변의 얼음이 풀리면 봄이 온다는 뜻으로 이 곳의 이름이 지춘정이라 한다.

중국의 정자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지붕이 이층으로 되어 있다.

 

곤명호

이화원은 전체의 3/4 가량이 호수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호수를 곤명호(昆明湖, 쿤밍)라고 부른다.

 땅을 파서 만든 거대한 인공호수인데 직접 보면 마치 바다와 같은 느낌이 들 정도이다.

곤명호라는 이름은 한나라 무장이 장안의 쿤밍 연못에서 군대를 훈련시켰던 고사에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곤명호를 세우려고 파낸 흙을 쌓아 올린 것이 공원의 북쪽에 있는 만수산(완서우)이다.

이 만수산 자락에 이곳 건축물의 대부분이 들어서 있고

이 대부분의 건축물들은 남으로 곤명호를 바라보며 만수산 자락에 있다.(출처: 테마백과)

 

곤명호수 남쪽으로 아름다운 다리 십칠공교와 남호도

 

곤명호수 가운데 조성된 인공섬인 남호도 안에는 함허당, 월파루, 감원당이 있으며.

 동북 구석에는 제취원이라는 작은 정원이 있다.

남호도 가운데의 함허당에서는 서태후와 황제가 해군들의 훈련을 관람했다고 한다.

 

남호도와 곤명호수 동쪽을 연결해 주는 십칠공교는 청의 건륭제 재위 기간에 축조되었으며,

중국내에서 가장 큰 규모의 석교로  17개의 아치로 이루어져 있고 넓이는 8m,길이는 150m에 달한다.

석조다리 양 옆 난간 위에는 크기와 생김새가 각기 다른 돌사자 544마리가 조각되어 있다.

17공교는 황제가 배를 타고 곤명호를 유람할 때 그 아래를 지나 다녔는데 좌우에서 세었을 때

모두 황제의 숫자인 9가 되게 하기 위해 일부러 17개의 구멍을 만들었다는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곤명호는 도교의 一水三山 (일수삼산)의 원칙에 따라 세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각각에는 신선의 섬인 봉래, 방장, 영주를 상징하는 인공섬이 만들어져 있다.

 

만수산  불향각

이화원 만수산 남쪽 거의 모든 지역에서 볼 수 있는 불향각은

거대한 팔각형 모양의 3층 목탑 형태로 티벳 라마불교 사원의 모습을 하고있는 건물이다.

이화원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1층에는 운외천향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천수천안보살이, 2층에는 청 건륭제때의 삼세불상,

3층에는 불향각의 건축예술을 전시하고 있다.

최상층은 천단공원이나 자금성에서 황제를 상징하는 금으로 도금된 꼭지모양의 장식을 하고 있다.

 

불향각 뒷편으로 보이는 지혜해 건물

 

 불교 건축물로서 불향각 위쪽 방향의 최고점에 위치하고있다.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침공했을때도 불상의 머리부분을 제외하고는 피해를 입지 않았다.

부처의 지혜가 끝없이 무한하다는 의미를 지칭하고 있으며 만수산 중턱의 절벽에 위치한다.(출처:두산백과)

 

이화원 만수산 정상에는 중향계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패방이 있고

그너머로 관세음보살을 모신 불교전각인 지혜해가 있다. 만수산에서 가장 높은 부분에 있는 건물이다.

목조건축물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목재를 하나도 사용하지 않고

벽돌과 유리기와 등으로 지은 건물로 벽면에 감실을 두어 불상을 모시고 있다.(출처: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 

 

 

 

 

낙수당

서태후가 평소에 기거하던 장소이다. 정전, 와실, 기거실 3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태후는 오래 살기 위해 상당히 노력했는데,

낙수당 (즐겁게 장수하는 곳) 이름처럼 

당대 평균 수명이 40대였다는데 70이 넘게까지 살았으니 장수한 셈이다.

 

1903년 중국 최초로 전등이 가설된 곳이라 한다.

이 전각 안에는 일렬로 늘어 선 유리병풍이 압권이라는데

내부가 공개되지 않아 보지 못했다.

 

 

낙수당은 대형 사합원(베이징의 전통 주택양식)으로 서태후의 침전이다.

대전은 붉은 기둥에 회색지붕으로 조형이 특이하고 웅장 화려하다.

낙수당은 겨울엔 따뜻하고

여름엔 계곡의 물이 낙수당 아래로 흐르게 설계해서 시원했다고 한다.

 낙수당의 중앙에 있는 방이 서태후가 기거하던 곳이다.

서태후가 하루 식사하는데 드는 비용이 은 60냥이 들었다고 하는데,

 은 60냥이면 당시에 쌀 45가마 정도를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요리사만도 84명이었으며 그밖에 다과나 유제품 등을 만드는 사람까지 합하면

무려 120여명이 서태후의 입맛을 시중들었다고 한다. 

 

낙수당 앞의 수목자친은 호수와 접점에 세워진 전각인데,

 배를 이용해 이화원을 왕래했던 서태후가 용선을 타고 내리던 부두 겸 낙수당의 호숫가 정문이다. 

 

 

낙수당 뒷편의 건물들은 공개되어 있지 않다.

 

 

장랑의 시작인 요월문

 

 

장랑

이화원 입구에서 들어오면 동쪽편 요월문에서 시작하여 서쪽 석장정까지 연결된 긴 복도인데

서태후가 이 복도를 걸으면서 곤명호수와 채색되어 있는 그림을 감상했다고 한다.

이화원 내부에는 서태후가 다니는 길을 따라서 지붕이 있는 복도가 조성되어 있다.

 

장랑

이화원 장랑은 배운전 앞 패루를 중심으로 곤명호 호숫가에 조성되어 있는

273칸의 세계에서 가장 긴 회랑으로 14,000쪽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곳에 있는 14,000여 폭의 장랑회화는 소식채화에 속하며, 중국 목조건축물에 꾸며진 장식예술이다.

그림의 주제는 자연과 동물, 인물, 전기 등 중국고전문학의 내용에 등장하는 것이다.

건축형식이 독특한 장랑은 회화가 다채롭고

그 수 또한 많아서, 세계에서 가장 긴 화랑으로 평가되고 있다.

 

복도 난간은 잠시 앉아서 쉴 수 있는 의자 역활을 하기도 한다.

 

이화원의 절경중 또 하나의 백미가 장랑인데,

장랑은 대치형으로 이루어진 만수산 아래의 건축구조를 하나로 연결해주는 역활을 하며,

세계의 화랑중에서 가장 길고 아름다운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옆의 광활한 곤명호를 비와 햇빛 등을 피하며 마음껏 볼 수 있는

천간낭하라고 불리는 장랑

 

 

 728미터에 이르는 장랑은

중국 고전 문학에 나오는 장면들을 묘사한 1만 4천여 점의 회화로 정교하게 장식된 산책로이며 화랑이다.

 

 

복도 천정난간에는 역사적 인물이나 서유기와 같은 민담, 삼국지연의 등에 나오는 장면이,

기둥에는 새와 꽃, 강남의 풍경 등이 그려져 있다.

 

 

장랑 중간 중간 솟을대문처럼 천정이 솟은 곳이 있는데 (여러개의 기둥을 쌓아 올린 감입천정)

그곳에 편액이 있고 편액 모양이 직사각형이 아니고 박쥐모양을 비롯하여 모양이 다양하다.

벽면에는 극채색으로 산수화, 화조화, 신선도 등 많은 그림을 그려 놓았다.

 

 

서태후의 침전 겸 집무실인 낙수당에서 시작되는 장랑은

동쪽 요월문에서 시작하여 서쪽 석장정까지  총 길이가 728m, 모두 273칸으로 되어 있으며

중간에 유가, 기란, 추수, 청요의 팔각정자는 춘하추동 사계절을 상징한다.

또한 강가와 산발치를 돌아가는 건축양식은 강호의 멋과 산색을 조화시킨 것으로 단조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굴곡의 꺽임을 두었는데 시야가 넓어지는 것을 이용하여 기막힌 절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치밀하게 설계되었다.

 

서태후가 지나다니는 긴 복도가 조성되어 있다.

 

외부에서 본 장랑

 

 곤명호수의 물길이 열린다면 아주 아름다웠을 장랑 옆 수로

 

 

장랑 옆으로 측백나무를 심어 또 하나의 측백나무 숲으로 된 긴 길이 조성되어 있다.

 

이화원 건물들과 곤명호수 곳곳에 공안들이 지키고 있다.

 

이화원은 서태후의 여름 피서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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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원 지도

 

 

서태후(자희황태후) 청나라 말 최고의 권력자

1835.11.29 ~ 1908.11.15

 

아름다운 자태, 불타는 야망

19세기 말, 서태후는 황제는 아니었지만,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들며, 나라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였다. 20세기도 아니고 19세기에, 거기다 남성중심의 유교국가 중국에서 여성이 47년 간 통치자였다는 사실은 서태후가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매우 탁월한 인물이었음을 말해준다. 서태후가 집권할 당시 청나라는 대내외적으로 복잡한 상황에 처해있었다. 외적으로는 서구열강이 호시탐탐 중국 땅을 노렸고 내적으로는 250여 년 간 만주족의 지배를 받던 한족들이 여기저기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면서 일어나고 있었다. 어쩌면 중국역사상 가장 위태롭고 혼란스러운 시기였을지도 모를 19세기 말, 최고 권력을 가졌던 서태후의 행보가 이후 중국의 운명을 일부 결정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효흠현황후, 자희태후라고도 불리는 서태후는 1835년 안휘성의 몰락한 관리의 딸로 태어났다. 만주족이었고 성은 예흐나라, 어렸을 때 이름은 행정 혹은 행아였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서태후의 어린 시절은 매우 빈곤해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애인 영록을 버리면서 까지 궁녀가 되고 싶어 했다. 1851년 16세에 궁녀가 되어 자금성에 들어간 서태후는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다. 욕심 많고 진취적이었던 서태후는 궁녀 이상의 그 무엇을 원했다. 젊음과 미모가 있었고 거기에 더해 묘하게 사람을 설득할 수 있는 말솜씨가 있었던 서태후는 함풍제 주변 환관들의 환심을 샀고 곧이어 황제의 눈에 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황제의 유일한 혈육을 낳았다. 아들이었다. 이것은 하늘이 그녀에게 준 일생일대의 기회였다.


젊은 시절의 서태후

  

 

서태후는 일개 궁녀에서 일약 귀비로 뛰어 올랐다. 서태후는 이 지점에서 더 큰 야망을 꿈꾸기 시작했다. 귀비가 되어 황제의 옆에 있다 보니 나라의 정사가 하나하나 눈에 들어온 것이다. 그저 황제의 후궁으로, 황태자의 모후로 얌전히 사는 것에 만족하지 못했던 서태후는 때때로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함풍제는 그녀의 마음에 담긴 야망을 알아차리고 이를 무척 경계하였다. 유일한 혈육의 어머니인 서태후가 훗날 폭주할 것을 두려워한 함풍제는 그녀를 죽일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860년 서구 열강의 북경 침범과 피난 과정에서 함풍제는 31세에 요절하고 만다. 유일한 후계자인 황태자의 어머니 서태후. 그녀의 6살 난 아들이 동치제로 황제가 되자 서태후는 수렴청정을 시작했다. 마침내 그녀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자식마저 희생시킨 권력욕

서태후의 아들 동치제


수렴청정은 함풍제의 정비인 동태후와 같이 했지만, 그다지 정치에 관심이 없고 문맹이었던 동태후는 서태후에게 정치전반을 맡겼다. 이때 서태후는 비로소 ‘서태후’ 라는 명칭을 얻게 된다. 황제의 궁을 가운데 두고 동태후와 서태후의 거처가 동쪽과 서쪽에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수렴청정 초기 서태후는 황족인 공친왕과 연대하여 청나라의 자강운동에 힘을 기울였다. 제도와 인사 개혁을 통해 한족들에게도 기회를 주었고 태평천국의 난도 완전히 진압하는 등 부국 자강운동은 어느 정도 성과를 이루었다. 후세에서는 이시기를 동치중흥이라고 하기도 한다.

 

동치제를 허수아비로 두고 발 뒤에서 실제로 중국을 다스렸던 서태후였지만 그녀의 권력에는 치명적인 한계가 있었다. 그녀가 중국을 다스릴 수 있도록 만들어준 고맙고도 고마운 존재, 바로 아들 동치제가 언젠가는 반드시 권력을 빼앗아갈 정적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권력은 황제가 성장하여 친정을 하게 되면 내주어야만 했다. 아들의 성장을 대견스러워 해야 할 어머니로서는 절대 가져서는 안될 생각이 서태후를 사로잡기 시작했다. 권력욕 앞에서는 아들이든 아니든 다 자란 황제는 무조건 눈의 가시였던 것이다.

 

게다가 동치제는 생모인 자신보다 후덕한 동태후를 더 따랐고 황후도 동태후의 가문에서 골랐다. 지방의 몰락한 관리의 딸인 서태후가 쉽게 다룰 수 없는 명문가 출신의 며느리인 황후는 눈엣가시였다. 언젠가 황제가 성인이 되어 친정을 시작할 때쯤 황후의 가문은 득세하고 자신은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될 것은 보지 않아도 훤한 일이었다.

 

 

 

 

서태후는 며느리인 황후와 황제 사이를 갈라놓고 끊임없이 황후를 구박하였다. 또한 황제의 관심을 정치에서 돌려 환락에 빠져들게 하였다. 동치제는 서태후의 사주를 받은 환관의 손에 이끌려 궁궐 밖 홍등가에 드나들었다. 열락의 세계에 빠져 허우적대던 황제는 마침내 몹쓸 병에 걸린다. 황제가 병에 걸렸다는 소식은 서태후에게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이미 동치제는 아들 이전에 권력을 뺏으려는 라이벌이었다. 서태후는 동치제가 치료받지 못하고 고통 속에서 죽어 가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리고 황제가 죽고 나자 아이를 가진 황후를 구박하여 자살하게 만든다. 서태후의 눈에는 황후의 뱃속에 든 아이마저도 손자라는 애틋한 마음보다는 미래의 경쟁자이기에 없애버려야 할 존재였던 것이다.

 

 

황제 위의 권력

권력 앞에 모성애마저 버린 비정한 어머니, 서태후는 동치제를 이을 다음 황제로 함풍제의 동생과 자신의 여동생 사이에서 난 광서제를 골랐다. 서태후는 광서제의 큰어머니이자 이모였다. 즉위 당시 광서제의 나이는 불과 네 살이었다. 여타 성인 황족들을 물리치고 구태여 네 살의 광서제를 황제로 고른 것은 서태후가 수렴청정을 통해 계속 중국을 다스리겠다는 의지 표명에 다름 아니었다. 광서제는 친아들마저 희생시킬 수 있는 비정한 서태후에게 주눅 들어 기 한번 펴지 못하고 자랐다. 황후의 간택에도 마음에 둔 여인이 따로 있었지만 결국 서태후가 골라준 서태후 가문의 여인을 황후로 맞아야만 했다.

 

1889년 서태후는 동치제와 광서제에 이은 오랜 수렴청정 끝에 광서제를 결혼시키면서 뜻밖에 황제의 친정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자금성 북쪽에 새로 지은 이화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외형상으로는 광서제에게 권력을 이양하고 뒤로 물러 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외형상’ 일 뿐이었다. 이미 궁궐과 조정에는 서태후의 사람들뿐이었고 광서제는 자주 이화원으로 문안인사를 가서 서태후에게 국정을 보고하고 지시 받았다. 서태후가 수렴청정을 끝낸 것은 이미 수렴청정이라는 형식이 그녀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발을 드리우건 걷어버리건 중국을 통치 하는 것은 광서제가 아니라 서태후였고 그녀는 황제 위의 최고 권력이었다.


서태후가 황제로 고른 광서제

 

 

변법자강운동의 실패와 수렴청정의 재개

그러나 명목상이든 허수아비든 간에 중국의 황제는 광서제였다. 이제 어엿이 성인이 된 광서제는 자신의 나라를 자기가 직접 통치하고 싶었다. 서태후의 전횡으로 기울어가는 청조도 광서제에게는 큰 걱정이었다. 광서제는 청일전쟁을 통해 황제의 좁은 입지를 벗어나보려 했다. 그는 서태후를 졸라 청일전쟁을 일으켰고 승리를 확신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예상 외로 강했다. 거기에다가 청일전쟁에서의 승리가 광서제의 입지를 넓혀주는 계기가 될 것을 두려워한 서태후의 방해 공작도 있었다. 서태후는 전쟁 중에 군비의 일부를 빼돌려 이화원을 치장하는 데 썼다. 청일전쟁은 청나라의 어이없는 패배로 끝이 나고 청나라는 세계 만방에 자신들의 국력이 형편없음을 알리는 꼴이 되고 말았다. 열강의 압박은 심해졌고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된다는 분위기가 청나라 지식인 사회에서 형성되었다. 광서제는 이 지식인층의 새로운 분위기에 적극 동조했다. 그들의 의견을 수용함으로써 나라도 부강하게 하고 서태후로부터 벗어나보자는 것이 광서제의 속셈이었다. 캉유웨이, 링치차오(양계초)를 비롯한 많은 지식인 학자군이 시대에 맞지 않는 법과 제도를 고쳐 나라를 부강하게 하자는 취지로 변법자강운동에 나섰다.

 

그러나 이들의 개혁운동은 서태후와 그녀를 둘러싼 보수파들에 의해 번번이 방해를 받았다. 서태후 세력을 몰아내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한 개혁파와 광서제는 당시 군부세력으로 뜨고 있던 위안스카이를 끌어들였다. 그러나 위안스카이는 겉으로는 개혁파에 동조하는 척 할 뿐 뿌리 깊게 이해타산을 따지는 인물이었다. 그는 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쪽이 어디일까 주판알을 튕겼고 서태후를 선택했다. 그는 서태후의 애인 영록을 찾아가 광서제의 모든 계획을 낱낱이 고발했다. 그렇지 않아도 광서제와 개혁파의 행보가 마음에 들지 않던 서태후는 이때를 기회로 삼았다. 그녀는 광서제를 자금성 영대에 유폐시켜 버리고 그를 도와 변법자강에 나섰던 지식인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처형했다. 캉유웨이를 비롯한 일부는 해외로 망명하여 목숨만은 건졌지만, 어쩌면 청조의 마지막 시도였을지도 모를 변법자강운동은 이렇게 허무하게 끝을 맺고 말았다. 무술정변 후에 모든 견제 세력이 사라진 조정에 서태후의 독무대가 차려졌다. 비록 명분상으로는 수렴청정이 다시 시작된 것이었지만, 서태후에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을 것이다.

 

 

사치와 향락의 나날

정치에서 최고 권력을 가졌던 서태후였던 만큼 그녀는 어린 시절의 가난에 복수라도 하듯 사치를 즐겼다고 한다. 서태후의 사치와 향락은 중국 역사상에도 그 유래를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녀가 먹는 음식은 한 끼에 128가지나 되었다. 돈으로 환산하면 백은 100만 냥이었다. 이것은 당시 중국 농민의 약 1년 치의 끼니에 해당하는 정도의 금액이었다. 옷은 3000여 상자나 되어 하루에도 몇 번씩 옷을 갈아입고 다녔고 특히 보석에 대한 애착이 대단하였다. 언제나 비취와 진주로 머리 장식을 했으며. 비취 구슬과 진주를 매단 옷을 입었다. 비취 팔찌, 비취 반지뿐 아니라 손톱에까지 비취 보호판을 달았다. 식탁도 비취로 만든 식기들로 차리게 했으며, 비취로 악기를 만들어 연주하게 하였다.

 

 

보석과 비단으로 치장한 서태후. 손톱에는 비취보호판을 달아 매우 길고 뾰족해 보인다.

 

 

서태후가 부린 사치의 가장 극단적인 예는 바로 현재까지도 중국의 대단한 문화유산으로 남아 있는 이화원이다. 서태후는 청일전쟁 중에 함대를 만들 돈을 빼돌려 자신의 처소인 이화원을 치장하였다. 나라의 존망이 달린 전쟁 중에도 오로지 처소 꾸미기에 급급했던 서태후의 배짱은 크다면 크고 달리 보면 황당하기까지 하다. 이화원은 현재까지도 그 화려함에 혀를 내두르게 되는데, 특히 인공으로 파낸 호수는 마치 바다와도 같다. 국가 최고 권력에 오른 서태후에게 황제의 후궁으로서 지켜야 할 정절 같은 건 콧방귀꺼리도 되지 않았다. 함풍제가 죽고 27세에 젊은 과부가 된 서태후는 권력을 잡자마자 고향에 버리고 온 애인, 영록을 불러들였다. 영록은 평생의 그늘 속 애인으로 머물면서 그녀의 사치와 향락을 뒷받침하였다. 서태후는 영록 외에도 마음이 내키면 언제든지 남자를 취했고, 수시로 갈아치웠다고도 한다.

 

 

청나라의 운명과 함께한 서태후의 죽음

그 어떤 정적도 두렵지 않고 외세의 압박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던 철의 여인 서태후도 이겨내지 못할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세월이었다. 그녀도 나이 들어 노쇠해졌고 극심한 사치와 향락은 노인에게 오히려 독이 되었다. 그래서였을까. 몇날 며칠 동안 계속된 자신의 생일잔치에서 너무 많은 음식을 먹은 서태후는 이질에 걸린다. 그보다 며칠 앞서 10년간 유폐되어있던 광서제는 위안스카이가 보낸 보약을 먹고 38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위안스카이가 보낸 약은 보약이 아니라 독약이었다. 광서제의 죽음을 전해들은 서태후는 매우 담담해했다고 한다. 그리고 역시 독단으로 광서제의 동생인 순친왕의 불과 세 살 밖에 안 된 아들을 다음 황제로 지목했다. 그가 바로 청나라 마지막 황제 선통제 부의였다. 세 살짜리 부의를 선택했을 때 서태후는 곧 병을 털고 일어나 수렴청정을 이어갈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노령은 이질을 이기지 못했다. 서태후는 광서제가 죽고 얼마 되지 않아 살아생전 그토록 핍박했던 조카를 따라 유명을 달리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마지막 유언은 다시는 여자가 정치를 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출처: 네이버 캐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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