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요한 거리, 노르웨이 왕궁, 국립극장, 국회의사당
비가 오다 안오다를 반복하는 가운데
아케르스후스성을 보고 중국식 레스토랑인 금산에서
점심 식사를 한 뒤 카를 요한 거리에 왔다.
여기서 40분 자유 시간을 가지고 금산 레스토랑 앞으로 가야 한다.
여행전 검색으로 알고 온 카를 요한 거리를 중심으로 보고 싶은 곳이,
왕궁, 국립극장, 국회의사당, 국립미술관,오슬로대학, 오슬로 대성당, 입센박물관이었는데
정확한 위치도 모른채 방류된 이 상황에서,
시간을 계산해 보니 금산까지 가는 시간 10분 제하고 남는 시간은 30분이었다.
일행 모두가 나를 기다리는 상황은 만들지 말아야 하겠기에,
뭉크의 절규를 보고 싶은 맘 간절하지만 선택의 여지 없이
국립미술관과 입센박물관은 제외 시켰다.
그리곤 거리 끝쪽에 있는 왕궁을 기점으로 국회의사당까지의 거리를 나홀로 걸어 다녔다.
카를 요한 거리
이 거리의 이름은 19세기 초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왕을 겸한 카를 14세의 이름을 따서 지었으며,
동,서 거리로 나뉘어 있다.
오슬로역이 동쪽 끝, 오슬로 왕궁은 서쪽 끝에 위치하며,
그 가운데에는 19세기 중반에 지어진 오슬로 의회 건물이 있다.
오슬로 왕궁은 거리 중간에서 보았던 의회만큼이나 개방돼 있다.
의례적으로 배치된 듯한 위병 몇 명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통제절차가 없기 때문에 평온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
노르웨이 왕궁
카를 요한 거리 끝의 언덕에 있는 하랄 5세 일가가 거주하는 오슬로의 슬로테트 궁전은 1849년 스웨덴-노르웨이 연합 왕국의 국왕 칼 14세 요한(1763~1844)에 의해 지어졌으며, 덴마크 태생의 건축가 한스 린스토우가 설계하였고, 1824년부터 25년간의 공사기간을 거쳐 칼 14세 요한의 사후인 1849년 완공되었다. 3층 건물로 173개의 객실이 있으며, 현관· 그레이크홀· 응접실· 내각회의실· 연회홀· 궁전예배당 등이 있다. 다른 유럽 국가들의 왕궁과 비교하면 화려한 장식이 없는 소박한 편이다.
노르웨이 왕궁현재 공사중이라 임시 철망으로 입구를 통제하고 있다.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국왕을 겸하던 시절에는 대개 스웨덴의 스톡홀름에 머물면서 잠시 방문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었으며, 1905년 이후 노르웨이 독립국의 국왕으로 즉위한 하콘 7세때부터 영구적인 궁전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2002년 이후에는 정문과 담장을 없애고 일반인에게 개방되어 오슬로 시민의 대표적인 공원 및 휴식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왕궁 앞에는 칼 14세 요한의 기마상이 세워져 있다.
카를14세의 기마상
1818년 당시 스웨덴 왕인 동시에 노르웨이를 지배했던 왕인 카를 14세 요한은 원래 나폴레옹의 장군인 장 밥티스트 베르나도테인데 그는 처음 졸병으로 출발하여 1804년의 프랑스 대혁명을 기해 원수에 올라, 나폴레옹 1세의 신임받는 신하가 되고 1810년 스웨덴 의회로부터 황태자로 뽑혔다.1812년, 러시아 황제와 동맹을 맺어 다음 해 나폴레옹을 라이프치히에서 쳐부수었다. 그는 오늘날의 스웨덴 왕가의 시조이다.
밑에 베이지색 건물이 오슬로대학이다.공사중이라 대형 차일 막이 쳐져 있어 사진을 찍지 않았다.
오슬로 대학은 노르웨이의 국립대학으로, 1811년 덴마크령(1397∼1814)으로부터 독립을 요구하는 노르웨이인들의 요망에 따라 프리드리히 6세가 창설하였다. 노르웨이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교이며, 대강당의 E. 뭉크의 벽화가 유명하다.
왕궁에서 오른쪽 도로
카를 요한 거리인 국립극장쪽으로 걸어갔다.
카를 요한 거리는
약 1.3㎞에 이르는 거리로
오슬로 중심부를 동서로 가로지르고 있는 최대의 번화가이다.
오슬로 국립극장 분수대
국립극장의 뒷문
이름이 꽃에 묻혀 있어 검색을 하지 못해 누군지 알 수가 없다.
루드비그 홀베르그 Ludvig Holberg (1684-1754)
덴마크의 철학자 ·극작가. 코펜하겐대학의 형이상학 교수와 라틴어 수사학 교수를 지냈다. 덴마크사, 교회사 외에, 철학서인 도덕적 사고 등으로 덴마크 철학의 기초를 쌓았으나, 오히려 극작가로서 더 유명하다 .
노르웨이의 베르겐에서 출생하였다. 육군 장교인 아버지가 그를 노르웨이에서 낳았기 때문에 덴마크와 노르웨이는 각각 자기 나라의 위인으로 추앙한다.
JOHANNE DYBWAD (1867–1950) 노르웨이의 여배우 그리고 무대제작자
오슬로 시내 카를 요한 거리 서쪽에 있다. 1899년 지어진 건물이며
건물 앞에는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극작가 입센과 비에른손(노르웨이 국가 작사자이자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동상이 서 있다.
극장 안의 호화스러운 로코코 홀은 입센의 연극을 공연하기 위해서 지은 것이다.
국립극장측은 2년에 한 번씩 8월 말에서 9월 초에 국제적인 입센 축제를 개최한다.
축제 기간 동안에는 연극 공연뿐만 아니라 콘서트, 전시회, 심포지엄등 다채로운 행사가 열린다.
요한 할보르센(1864-1935)노르웨이 출신의 작곡가이자 지휘자, 바이올리니스트
그리그가 수립한 노르웨이 민족음악을 발전시켰으나, 그리그와는 확실하게 구분되는 스타일로 작곡하였다. 그리그의 여러 개의 피아노곡을 오케스트라용으로 편곡하였는데, 그 중 하나를 그리그의 장례식에서 연주하였다. 1899년 개장한 크리스티아니아(오슬로) 국립극장의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임명되었고 1929년 은퇴할 때까지 30여 년동안 지휘자로 활동했다. 이 기간동안 30여개의 오페라를 지휘했고 또한 30여개의 무대음악을 작곡하였다. 은퇴 후에는 마지막 음악적 정열을 집중시켜 세 개의 교향곡과 두 개의 노르웨이 광시곡을 작곡하였다.
헨리크 입센 (1828-1906)
노르웨이의 극작가. 힘차고 응집된 사상과 작품으로 근대극을 확립하였고 근대 사상과 여성해방 운동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인형의집》으로 온세계의 화제를 불러모으며 근대극의 1인자가 되었다. 유령, 민중의 적등의 작품으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며 사람들을 열광시켰다.
헨릭 입센 경이 살아있을 때 만든 동상인데,
본인은 늙어 보이고, 배가 나온 이 동상을 싫어했단다.
비에른스티에르네 마르티니우스 비에른손 (1832년-1910년)
비에른스티에르네 마르티니우스 비에른손은 노르웨이의 소설가·극작가이다.
대학 시절에 이미 신문에 극평 등을 발표하였고, 희곡을 써서 이름을 날렸다.
노르웨이의 연극을 덴마크의 영향으로부터 해방할 것을 주장하였고,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힘썼다.
1903년 북유럽 가요의 연구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작품으로 소설 아르네, 희곡 파산, 왕등이 있다.
백화점 건물
무료로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다.
오슬로 국회의사당쪽으로 내려 가고 있다.
카를 요한 거리는
상점과 레스토랑이 즐비하며 중앙역과 왕궁을 연결하고,
거리의 중심에는 국회의사당이 있다.
거리의 서쪽에는 입센과 비에른손의 동상이 서 있는 국립극장이 있다.
헨리크 베르겔란 (1808-1845) 노르웨이의 낭만파 시인
덴마크 문화를 배척하고 민족적인 국민문화의 진흥에 힘쓴 노르웨이 독립기의 국민시인으로서 국민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덴마크와의 협조를 주장한 시인 벨하벤과의 열띤 논쟁은 유명하며, 대표작에 장편서사시 창조 ·인간 및 구세주(1830), 얀 반 후위숨의 꽃장식(1840), 영국의 도선사(1844) 등이 있으며, 짧은 서정시 중에도 뛰어난 작품들이 많다.
노르웨이 사람들은 일부러 비를 잘 맞고 다닌단다.
그랜드호텔
고풍스러운 시계탑이 있는 140년 역사의 그랜드호텔은 매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가 머무르고 수상 축하 연회가 열리는 곳이다.
그랜드호텔 카페
세계 문화사에 한 획을 그은 한 명의 노르웨이인이 그랜드호텔 1층 그랜드카페에 앉아 사람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인형의 집 (1879), 유령 (1881) 등으로 근대 사실주의 연극을 창시한 입센이다. 그는 무려 27년간 외국에서 살다가 1891년 고국으로 돌아와 오슬로에 정착한 후, 자신의 아파트에서 걸어서 10여 분 거리에 있는 그랜드카페를 10년간 거의 매일 찾았다. 장중한 분위기의 목재로 꾸며진 카페 안에는 지금도 그가 늘 앉던 테이블이 보존돼 있고 그의 모자가 얹혀 있다.입센은 매일 오전 9시에 서재에서 일을 시작해 11시 반이 되면 무조건 중단하고 그랜드카페로 향했다. 거기에서 사람들과 어울리지는 않고,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신문을 읽었다. 특히 광고를 열심히 읽었는데, 광고만큼 세상과 대중의 변화를 첨예하게 보여주는 게 없다는 생각에서였다.입센은 오후 2시가 되면 어김없이 다시 집으로 향했다. 그의 아파트가 바로 지금의 입센박물관이다국립극장이 1899년 처음 열었을 때 개막작 3편 중 하나가 입센의 민중의 적 (1882)이었다.
국회의사당
이곳 의회는 권위와는 거리가 먼 국민 바로 옆에서 살아 숨쉬고 있는 진정한 의미의 대의기관 이다.북유럽 국가의 국회의원들은 보좌관이 없고 보수도 작은 국민을 위한 봉사자라고 한다.
노르웨이는 입헌군주국으로 집권당에서 수상을 내세워 정치하는 내각책임제이다. 현재 노르웨이의 집권당은 노동당이고, 수상은 옌스 스톨텐베르그이다. 노동당이라해도 사실 온건좌파로 중립에 가깝다. 다음 다수당이 진보당으로 우파라고 볼수 있다. 2009년 선거결과, 169석의 전체 국회좌석 중에 노동당이 64석, 진보당이 41석을 차지했다. 노르웨이는 역사적으로 노동당이 자주 집권당이 된다.
CHR. MICHELSEN
이름 밑에 설명을 NORGES STATSMINISTER 1905라 되어 있는데NORGES는 노르웨이고 STATSMINISTER는 스웨덴어로 수상이라고 어학사전에 나와 있으니1905년도에 노르웨이 수상을 하신 분인가 보다. 검색에 나오지 않아 더 이상의 설명은 불가.
여기서부터는 비 오던 카를 요한 거리를 찍던 날로부터 3일 뒤인,송네피요르드와 베르겐을 보고, 덴마크행 DFDS 크루즈를 타기 위해 다시 오슬로에 왔을때 찍은 사진들이다.날씨가 아주 맑고 청명하다.
그랜드 호텔노벨평화상 수상자는 수상 전날 이 호텔 2층에 투숙하며 , 베란다 난간에서 축하객들에게 손을 흔들어 답례한다고 한다.김대중대통령도 노벨평화상 수상식때 이 호텔에서 묵었다.
위에 비 올때 찍은 사진이랑 비교가 된다.
나체상 옆으로 노르웨이의 낭만파 시인인 헨리크 베르겔란의 동상과 그 뒤에 있는 국립극장의 비에른손의 동상이 보인다.
일조량이 부족한 북유럽은 날씨가 좋은 날이면 모두 햇빛에 온 몸을 내 놓고 있다.
국회의사당
오슬로에 있는 노르웨이 의회가 사용하는 건물로 1866년 3월 5일 완공되었다. 1814년 5월 17일 아이드스볼에서 헌법이 채택되면서 구성된 노르웨이 의회는1857년에 의사당 건축계획을 승인하였고, 스웨덴의 건축가 에밀 빅토르 랑글레가 설계했다.
1905년 노르웨이에서 독립의 움직임이 강하게 일어나 이를 저지할 수 없음을 알게 된 스웨덴-노르웨이 연합왕국의 국왕 오스카르 2세는 노르웨이의 왕권을 포기했다.이에 노르웨이 의회는 덴마크 국왕의 차남 카를 공을 군주로 선출하여 호콘 7세로 추대함으로써 독립된 군주국을 수립했다.호콘7세는 현 국왕 하랄 5세의 조부이다.
국회의사당
건물은 3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스칸디나비아 전통 건축양식과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의 건축양식이 절충된 형태로 지어졌다. 외벽은 밝은 회색과 노란색의 화강암 벽돌로 마감되어 있다. 1층 중앙 로비에는 역대 노르웨이 국왕의 초상화가 걸려 있고, 대회의장의 의장석 뒤에는 1814년에 있었던 최초 헌법제정 모습을 담은 그림이 걸려있다.
오슬로 시내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카를 요한 거리의 중심부에 있다. 의회가 열리는 기간을 제외하면 일반인에게도 출입이 개방되어 있고,의사당 건물 주변은 쾌적한 공원과 보행자 전용도로가 조성되어 있다.
국회의사당 오른쪽에 금융건물들이 보인다.
오슬로 대성당
1697년에 창건된 노르웨이 국교 루터파의 총본산
우리가 아는 말괄량이 삐삐는 스웨덴의 유명한 아동문학가인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책으로 말괄량이 삐삐의 원제는 삐삐 롱스타킹이다
카를 요한 거리에서 일행이 모이는 장소로 가는 길에 있던 상점들
달레 오브 노르웨이의 제품인지는 모르겠지만 양모를 기본으로 한 스웨터류를 만드는 회사로 전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이상 글 참고, 출처: 네이버 두산백과,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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