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베르겐] 브뤼겐거리, 베르겐어시장

푸른 바다. 2013. 7. 31. 12:58

 브뤼겐거리, 베르겐어시장

 

 

 

 

 

 

플뢰옌산에서 한 눈에 중세의 문화 유산을 가진 베르겐시를 조망하고

한자동맹 시절 독일상인들이 거주하던 목조 건물들이 있는

브뤼겐거리와 어시장쪽으로 내려왔다.

여기에서 40분 정도 자유시간을 가진 뒤 

하당에르 피요르드를 페리로 건너 하당에르 비다를 지나

야일로(게일로)로 가서 1박하게 된다. 

 

 

 

 

플뢰엔산 전망대에 올라 갔다가

브뤼겐 거리로 가기 위해 내려 가는 길이다.

 

 

 

 

브뤼겐의 역사는 14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시 북유럽 상권을 장악했던 북독일 무역상인 중심의 도시동맹인

  독일한자 상인들이 이곳에 상관을 짓고 무역을 했다.

이 지역에 풍부한 대구를 수출하고

곡물을 수입했던 그들은 독일 남자상인으로만 이루어진 집단으로,

엄격한 규율 아래 일만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럭셔리한 맥도날드 건물

 

북유럽을 여행하게 되면 맥도날드가 있는 곳에서는

무료라 우선적으로 화장실을 이용해야 한다.

어떤 맥도날드에서는 영수증 밑에다 화장실 키 번호를 입력 하는 곳도 있단다.ㅋ

나중에 이 앞으로  집합해야 하는 약속 장소이다.

 

 

 

 

베르겐은 7개의 산으로 둘러 쌓여있어

연중 비가 오는 날이 많은 데

 이렇게 맑은 날은 여름철 빼고는 흔치 않다고.

 

 

 

 

한자박물관

 

브뤼겐은 지금으로 치면 현장연수차 찾아온 독일 상인들의 본거지였다.

 이곳에서 10여 년간의 훈련을  마친 이들은

 본국이나 또 다른 한자동맹 도시를 거치며 상인으로서의 자격을 갖춰갔다.

 이는 매우 혹독한 과정으로 

처음 일을 배우기 위해 브뤼겐을 찾은 열 살 가량의 소년들은 목조건물의 

   특성상 화재의 위험을 예방하기 위해 불 한 번 때지 않고 겨울을 났었다고 한다. 

물론 아주 추울 때는 목조건물군 뒤쪽에 

취사를 목적으로 특별히 지어진 벽돌집에서 수십 명이 함께 잠을 자기도 했지만, 

 이처럼 어린 나이에 일을 시작한 한자동맹의 일꾼들은

 당시 바다에서 나는 은색 보물이라 불렸던

   대구 간유와 말린 대구를 주 사업품목으로 활발히 무역활동을 펼쳤다.

 당시 이들의 생활상을  그대로 옮겨놓은 한자 박물관에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것도 바로 저울에 올려진 말린 대구다.

 

 

 

 

 베르겐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인 한자박물관

 

노르웨이 북부의 건어물과 발트해 연안 국가들의 곡물을 거래해서 부를 쌓았던

 중세 브뤼겐의 역사를 볼 수 있는 다양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실제 상인들이 살았던 베르겐에서 가장 오래된 18세기 초 건물로

내부 구조와 인테리어가 과거 모습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초보 일꾼들이 자는 방과 응접실, 저장고 등을 갖추고 있다.

저장고였던 방은 현재 전시실로 사용되고 있다

조수들은 건물 위층에 벽으로 칸막이가 된 침대 방에서 생활하였다.

매우 좁긴 하지만, 화재의 위험 때문에 등불이나 난방을 할 수 없는 건물에서

그나마 따뜻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구조 때문이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회관 건물이 있다.

이곳에서만 불을 쓸 수 있었으므로, 모든 음식을 여기서 만들었다.

 

 

 

 

브뤼겐거리는

독일 한자동맹(항구도시끼리의 상인들의 조합)의 4개 지부 중 한 곳으로

독일인 전용주거지가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보겐만 입구에 면한 브뤼겐 거리에

 14~ 16세기의 목조건물이 15채 가량 남아있다.

 이는 한자 동맹 시대에 독일 상인들이 살던 집으로,

고향의 습관에 따라 주거와 일터 (창고)가 한지붕 밑에 있다.

 

 

 

 

 베르겐 사람들은 어디에서 왔느냐는 질문에

노르웨이에서가 아닌 베르겐에서 라고 대답한단다.

그만큼 이 도시 출신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러워 한다고.

 

 

 

 

베르겐은 곡물과 소금, 말린 대구의 중요한 교역항이었으며,

 한자 동맹이 아이슬란드에서 잡은 수산물을 모으는 집적소이기도 했다.

 

 

 

 

무엇을 의미하는 조각인지 검색에서 찿지 못했었는데,

1차대전때 희생된 선원들을 기념하는 기념비라고

 더블리너님이 댓글에서 알려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베르겐에는 노르웨이 최초의 국립극장,

 세계 최초의 교향악단이 자리한다.

 

 

 

 

이 길로 올라 갔으면

홀베르그 광장이 나왔을지 모르겠다.

 

 

 

 

베르겐은 고위도에 위치하나

 멕시코 만류의 뜨겁고 습한 공기가 7개의 산에 부딪혀

기후가 따뜻하고 연평균 280일(연강수량2,000mm) 정도 비가 내린다.

 하지만 한여름에는 맑고 청명한 날이 계속되는 곳이다.

우리가 간 날은 날씨가 화창하여 행운이었다.

 

 

 

 

건물에 연도가 써있는데 이 건물이 건축된 연도이다.

좌측의 건물은 아마 1480년도에 지어져

1712년, 1912년에 재건축 되었지 싶다.

(혹시 1702년 대화재 뒤 1712년에?)

 

 

 

 

도시 관광버스이다.

 

 

 

 

1476년과 1702년에는 대규모 화재가 발생했는데,

 그 때마다 도시를 원래의 도면대로 재건했다.

덕분에 베르겐의 브뤼겐 지역의 목조건물들은

 중세 후기의 도시 풍경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베르겐의 중심지이며 항구를 따라 

중세 독일식 건축물인 목조 가옥들이 늘어서 있는 브뤼겐이다.

항구 옆에 있는 브뤼겐은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두 차례 화재를 입었지만 지금은 모두 복원된 상태의 귀중한 건물들로

1979년에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브뤼겐에는 중세 한자동맹 상인들이 거주하면서 무역활동을 하던

북해지역 사무소, 창고, 점원들의 숙소등 다용도 공간이 있었다.

 

 

 

 

거리에는 옛날 분위기를 풍기는

레스토랑, 선물가게, 미술공예가의 작업장 등이 있다.

 

 

 

 

여행은 돌아갈 집과 일이 있다는 것이 방랑과 다르다고 했던가.

나에게 여행이란

 책이나 매스콤에서만 볼 수 있었던 낯선 땅, 낯선 사람들, 낯선 모습들을

실제로 내 눈으로 보고 느낄 수 있는 현실을 말한다.

그게 얼마나 나를 감격하게 만들고 행복하게 하는지 모른다.

 

 

 

 

세계 환경기구는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베르겐을 선정한 바 있고

 밴쿠버, 오클랜드와 함께

 베스트 5에 올라 이상적인 자연친화 도시로 손꼽히고 있다.

 

 

 

 

한자 동맹이란 13~15세기에 북해와 발트해 연안에 있던

독일 영향의 도시들이 상업상의 목적으로 결성한 동맹이다.

 당시 독일 상인들은 이 목조건물에 살면서 상업 활동을 펼쳤다고 한다.

베르겐의 특징인 삼각형 지붕의 목조주택도

이 당시의 건축 스타일에서 비롯된 것이다.

 

 

 

 

베르겐의 아름다움은 보겐항에 면한

한자동맹시대의 남아 있는 이 목조주택들의 영향이 크다.

 

 

 

 

앞쪽 건물들에는 독신 남자들만 살았고 뒤편으로는 홍등가였다는데

현재는 박물관, 레스토랑, 선물 가게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목조건물의 한 골목으로 들어가 보았다.

 

 

 

 

독일 상인들이 거주하던 독일 양식의 목조 건물들이다.

 

 

 

 

건물의 겉모습은 비슷하지만

 내부는 신분과 재산 정도에 따라 다르며,

 부유한 상인들이 살았던 곳도

 무척 간결하고 소박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갤러리

 

 

 

 

물건을 끌어 올리는 도르래가 보인다.

 

 

 

 

골목에는 창고나 가옥이 처마를 맞대고 빽빽하게 늘어서 있다.

 대부분 3층 건물이며,  정면은 가파른 삼각지붕이다. 

 

 

 

 

내부는 기능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간소한 가구가 놓인 좁고 긴 방이 있다.

이러한 구조는

 다른 중세 도시와 마찬가지로 화재가 났을 경우

큰 피해를 입을 수 있다.

 

 

 

 

 옛 상인들이 사무실이나 보관창고로 사용하던 건물로

1979년에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몇 번의 대형화재로 소실 되었지만

본래의 도면대로 망치와 톱만을 쓰던 전통기법으로 복원되었다.

 

 

 

 

1476년과 1702년의 화재는 꽤 규모가 컸는데,

그 때마다 브뤼겐은  본래의 도면 그대로 재건되었다.

 그래서 베르겐은 지금까지도

중세 후기의 도시 풍경이 그대로 살아있는 건물이 되었다.

 

 

 

 

가운데 골목길로 들어서 본다.

 

 

 

 

초기 건물은 독일 상인 들이 지은 것으로

여러 차례 화재를 겪었지만 설계도가 있어 완벽하게 복원했다.

 

 

 

 

걸을 때마다 삐걱대는 나무 보도와

집들로 채워진 어두컴컴한 골목은

현재 예술가들의 작업실로 이용된다.

 

 

 

 

나무 복도로 골목이 되어 있고 작은 갤러리들이 있다.

 

 

 

 

2,3층으로 무거운 물건을 들어올리는 도르래가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

 

 

 

 

사무실과 거주공간이 같이 있는 특이한 형태로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데

창문의 높이와 모양이 특이하다.

 

 

 

 

지금도 그 당시 생선을 잡아서

2층으로 옮길 때 쓰였던 밧줄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골목길 뒷쪽도 새로운 모습의 목조건물들이 있고

관광객들은 한 잔의 여유와 햇빛을 즐기고 있다.

 

 

 

 

현재 이  지역의 건물들은 레스토랑으로 사용하는 곳이 많으며,

레스토랑마다 독특한 요리를 제공하고 있다고 한다.

 

 

 

 

 말린대구의 모형과

사람들이 들여다 보고 있는 곳은 옛날 우물터이다.

위의 사진을 자르기하여 편집했더니 화질이 안 좋다.

 

 

 

 

독일이 중심이 되어 유럽 전역에

무역 동맹 도시를 건설한 한자동맹시대에

 베르겐은 북유럽의 거점도시로서 말린 대구와 연어를 비롯한

각종 수산물 거래로 부를 축척시켰다.

 

 

 

 

다시 목조 건물 안에서 나와 도로로 나왔다.

 

 

 

 

 도로를 따라 로젠크란츠탑 쪽으로 올라 가는 길에 있던 노천 카페

자유 시간이 촉박하여 한 잔의 여유를 즐길 시간도 없는게 안타깝다.

 

 

 

 

 

 로젠크란츠 타워

1560년 베르겐 성주였던 에릭 로젠크란츠

   스코틀랜드에서 가져온 돌로 견고하게 쌓아 올린 탑모양의 거주지로,

 요새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옆쪽으로 돌아가 하콘홀을 봤어야 하는데 이때는

마리아 대성당을 찿아 봐야겠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라...

 

 

 

 

   로젠크란츠 타워 뒷편에 있는 하콘홀

 

 노르웨이에 남아있는 가장 크고 오래된 중세시대 석조 건축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으로 파괴되었다가 1957년에 복원했다.

 로젠크란츠 타워는 스코틀랜드의 석조 장인들과 건축가들이 만든 방어용 성채로

 지하감옥과 주거시설, 포대 등이 설치되어 있으며,

현재는 베르겐의 역사적 유물과 민속예술품 등을 전시하고 있다.

 또, 노르웨이 레지스탕스의 영웅 군나르 쇤스테비가 옛 창고 건물을 개조해

2006년 개관한 베르겐후스요새 박물관에는

독일군에 저항한 노르웨이의 레지스탕스 역사적 유물과 자료들을 보존·전시하고 있다.

 

 

 

 

 로젠크란츠 타워

 

1070년 올라브 퀴레 왕에 의해 도시가 건설되었고,

 1240년대 서해안으로부터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성곽을 조성하였다.

 호콘 4세의 명령으로 1247년부터 1261년까지 왕실의 의식 및 연회장인 하콘 홀이 건축되었고,

1560년대 베르겐의 봉건 영주인 에릭 로젠크란츠는

 성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용 요새 건축물인 로젠크란츠 타워를 세웠다.

 이 밖에도 성 안에는 베르겐 대성당을 비롯한 저택, 막사, 창고 등이 있었다.

1665년 제2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의 보겐전투에서 네덜란드와 덴마크-노르웨이 연합군의 승리를 이끌었다.

 성이 건축된 중세시대 이후부터 현재까지 노르웨이 서남해안 방어의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독일군의 공습으로 많은 피해를 입기도 했다.

 

 

 

 

 로젠크란츠 타워 건널목 전 신호등 근처에서

항구 너머를 찍어 봤는데  저 곳이 신시가지인것 같다.

 

 

 

 

 당시 베르겐의 주 상업은

 북해에서 잡아 온 말린 물고기를 독일에서 가져온 밀과 

       교환하는 것이었는데, 한자동맹은 150년간 이 사업을 독점했다. 


 독일 상인들은 북해와 발트 해로 활발하게 진출하기 시작했고,

 베르겐에도 정착하게 되었다.

 베르겐에서는 주로 말린 대구, 소금에 절인 당근, 간유 따위를 수출했다.

 특히 말린 대구는 독일과의 교역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상품이었다.

 말린 대구는 그리스도교에서

고기와 육류 제품을 먹지 못하게 하는 금육제 때 식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식품이었다.

 따라서 말린 대구를 유럽 여러 나라로 대량 공급하기 위해

 독일과 베르겐의 교역은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한편, 베르겐에서는

수출용 생선을 가공하기 위해 많은 양의 소금이 필요했는데

뤼네부르크 등의 독일 도시에서는 한자 상인을 통해 베르겐에 소금을 공급해 주었다.

이후 베르겐에서의 교역 활동은

발트해 연안 도시 뤼베크를 중심으로 한 한자 동맹의 세력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SIGURD K ASSERSON (1882-1937)

사진작가

 

 

 

 

마리아 교회를  갈려고 2명의 베르겐 할머니들께

어설픈 영어로 물었더니 이 교회를 가르쳐 주었다.ㅋ

 

 

 

 

노르웨이는 묘지를 교회 마당에 묻는 풍습이 있다.

버스에서 지나친 각지의 교회들에도 교회 마당에 묘지가 있었다.

 

 

 

 

모이는 약속 장소에서

혼자 너무 많이 올라 온 것 같은 불안감 때문에

어시장쪽으로 내려 갈려고 빠른 걸음으로 턴 했다.

 

 

 

 

SNORRI STURLUSON 스노리 스툴루손 (1179 ~ 1241.9.22 )

 

아이슬란드의 시인이자 역사가이며 정치가.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시인으로

그의 저작 중에서 북유럽 신화인 산문 "에다" 만이 전해진다.

 

스노리가 이름이고 스툴루손은 스툴루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당시의 문화 중심지 오데에서 교육을 받고 당대 최대의 학자·시인으로 일컬어졌다.

 아버지는 강대한 세력을 가진 귀족이었으며,

 이러한 세력과 박학에 힘입어 의회 의장을 두 차례나 역임하였다.

 스노리가 그의 형제와 활약하던 시대는 스툴루 일족의 시대라고 불린다.

그는 명예심이나 물질욕도 강하여 정치에 관여하였는데,

아이슬란드를 식민지로서 지배하려는 노르웨이왕 호콘 4세의 모략에 말려들어

 자객에게 암살되었다. 

 

 

 

 

어시장쪽으로 내려가면서 찍은 사진인데 뭘 전시 해 놓은 것 같은데

아무도 없어서 들어가기가 뭐해  패스...

 

 

 

 

skuespiller 노르웨이(보크)어로 무명배우의 뜻이라는데?

 

더블리너님이 댓글에서 skuespiller의 뜻이 배우이며

이 흉상의 인물은 베르겐 출신의 유명한 배우라고 합니다.

감사합니다.^^

 

 

 

 

보겐항

 

오슬로뿐 아니라 베르겐도 바이킹의 거점이었다.

바이킹하면 침략, 약탈 등 해적 이미지이지만,

 사실 그들의 해양 활동은 민족 이동에 수반한  정복, 식민, 교역 등

중세 유럽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베르겐 사람들 역시 바이킹의 역사적 의미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특산물인 말린 대구를 수출하며 급속히 발전한 베르겐
17세기에 한자 동맹이 막을 내릴 때까지 

400년이 넘도록 번영을 누렸다.

 

 

 

 

생선을 들고 있는 목조각상이 간판으로 있는 레스토랑

 

 

 

 

항구 옆 레스토랑 골목이다.

 

 

 

 

베르겐 어시장

 

베르겐 항구 앞의 조그마한 광장에 위치한 토리게 어시장이다.

 일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시장이 열리며 기념품을 비롯하여

 막 잡아 올린 싱싱한 생선, 캐비어 등과 함께

 야채, 과일, 꽃 등을 사고파는 사람들로 붐빈다.

 훈제연어, 샌드위치 등 바로 먹을 수 있는 음식도 팔고 있다.

 

 

 

 

생선 샌드위치 파는 곳인데

피쉬케이크 맛이 궁금 했는데 크로네가 없어서...

 

 

 

 

부둣가의 광장에 있는 어시장

 아주 오랜 역사를 가진 유명한 베르겐의 명소이다.

 

 

 

 

한자동맹시대에는 베르겐의 부인들이 이 곳에서 장을 보면서

젊은 독일 상인들과 잡담도 나누었다 한다.

 

 

 

 

이 어시장은 중세시대의 한자동맹 당시부터 크게 번창했던 시장이다.

 

 

 

 

 

즉석에서 먹을 수 있는

연어와 대게, 조개, 새우등 신선한 해물을 비롯하여

 여러 종류의 해산물 가공식품들도 판매하고 있어

 어시장은 관광객들과 주민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이 시장은 베르겐 시에서지금도 당시의 영업형태와 규모를 그대로 유지하도록 규제하고 있다고.

 

 

 

베르겐의 특산품에는 호텔 뷔페에서 빠지지 않던 튜브 캐비어도 있다.

 

 

 

 

   저녁 장을 보러 나온 주민들과

 관광객들로 활기가 넘치며

 방금 잡아 온 바다 재와 훈제연어도 값싸게 구입할 수 있다.

 

 

 

 

 광장에는 일요일을 제외한 매일 08:00~ 15:00경에 장이 서며,

이제 막 잡아 올린 싱싱한 살아 있는 생선을 물통에서 꺼내 파는 광경도 볼 수 있다.

 

 

 

 

캐비아의 경우 생선의 종류에 따라 색깔과 가격이 다르고,

그 비싼 연어 알 한 통은 60$가 넘는다.

 

 

 

 

우리나라에도 많이 수입되는 노르웨이산 고등어는

우리나라산 보다 오메가3 기름이 더 많이 난다고 한다.

 

 

 

 

노르웨이 뷔페에서 맛 본 고등어, 대구살들 정말 맛있었다.

 

 

 

 

 

각종 모피들

 

 

 

 

노르웨이 특산품으로

 여우, 물개 등의 가죽과

순모 스웨터인 달레 오브 노르웨이 등이 유명하다.

 

 

 

 

 

 

 

 

 89 Kr (크로네)는

현 시점에서 우리나라 돈 17,800원 정도다.

 

 

 

 

베르겐의 각종 박물관, 시청, 홀베르그 광장, 마리아 대성당 등

 많은 곳을 보지 못하고 아쉽게 다음 여정지를 향해 떠난다.

 

 

 

베르겐에는

노르웨이의 국가와 솔베이지의 노래를 지은 영웅 그리그가

말년까지 살면서 작품 활동을 했던 생가가 있다.

 그는 피요르드를 마주볼 수 있는 곳에 책상을 배치했다.

 피요르드를 사랑했던 그는 이 책상에 앉아서 무한한 음악적 영감을 떠올렸다.

 노르웨이가 매장문화인데도 그는 화장해서 피요르드가 바라보이는 바위 안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사랑했던 아내 니나는 그가 죽은 후에도 그 곳에서 90세가 넘도록 홀로 살다가 바위 안 무덤에 함께 묻혔다.

 니나는 그의 사촌이었으며 가족들의 극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했지만

딸이 생후 16개월 만에 먼저 세상을 떠나는 불행을 겪었다.

 아직도 그가 살던 집 창가에 어린 딸의 사진이 예쁜 액자에 담겨 있다고 한다.

 평생 더 이상의 자식은 없었다고 하니 그의 슬픔이 전해져온다.

 

 

(내용 일부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