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성 이삭 대성당, 카잔성당

푸른 바다. 2013. 11. 19. 22:01

 

성 이삭 대성당과 카잔성당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첫 관광지인

 분수 정원이 너무나 아름다운 여름궁전을 보고 난 뒤

점심식사를 현지 레스토랑에서 먹고

에르미타쥐 박물관(겨울궁전)으로 가는 도중

세계 3대 성당 중 하나인 성이삭 성당을 둘러 보았다.

그리고 로마의 성베드로 대성당을 본뜬 네오클래식 양식의 건물인 카잔성당은

버스 안에서 조우하여 사진을 찍는 바람에 사진이 좋지 않다.

 

 

이삭 대성당

 

 

세계 3대 성당 중의 하나인 성 이삭 성당은 러시아정교회를 대표하는 성당으로,

1818년부터 1858년에 이르기까지 연인원 50만명이 동원되어 40년 걸려 완공을 한

세계에서 3번째로 큰 성당이며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랜드마크이.

 

 

성 이삭성당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아니고,

이사악키이 달마스키라는 러시아 정교회의 성인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성 이사악키이 달마스키의 축일이 5월 30일이었는데

바로 그 날이 표트르 대제의 생일이라

표트르대제(피터 1세)가 태어난 날을 기리기 위해 성이삭의 날인

5월 30일에 맞춰 준공된 것이란다.

 

 

 이삭 성당은 100Kg이 넘는 금을 녹여 만든 황금색 돔을 가지고 있으며,

성당의 둥근 천장이 21.83m, 높이 101.52m, 길이가 11.2m, 폭이 97.6m로

 30층 건물과 비슷한 높이이며,1만 4천명을 수용할 수 있다.

 64~117톤에 이르는 72개의 거대한 원형의 돌들이 둘러싸고 있다.

 

 

표트르 대제 시대에 바실리예프스키 섬에 최초의 성 이사악 성당이 건립되었다.

 그 뒤 1717년에 원로원 광장(현재 데카브리스트 광장)으로

이전했지만 연약한 지반 탓에 낙뢰로 소실되었다.

예카테리나 대제의 칙명에 따라 이탈리아 출신 건축가 안토니오 리날디의 감독 아래

 재건 사업에 들어갔지만, 미완성으로 끝나고

파벨 1세가 그녀의 유지를 이어받아 다시 재건에 참여하였다.

오늘날의 성 이사악 성당은 알렉산드르 1세 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프랑스 출신 궁정 건축가 오귀스트 드 몽페랑의 설계에 따른 것이다.

 몽페랑의 감독 아래 1818년부터 1858년까지 무려 40년에 걸쳐 지어졌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후에는 소련 정권 아래에서 박물관으로 이용되었다.[출처: 위키백과]

  

 

세계 3대 성당은

첫번째 로마 바티칸의 성베드로 대성당, 두번째 터어키 이스탄불의 성소피아 성당,

세번째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성 이삭성당이다.

 

 

43m의 성당 전망대에 오르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전경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러시아 정교회의 미사는

   1.일체의 악기나 마이크 사용을 안하며 목소리만으로 예배를 진행한다.
 집전 사제는 제단을 향해 앞으로 서서 미사 강론도 음율에 실어 찬송가로 한다.

   2. 사제나 신도나  자리에 앉는 것을 허용치 않는다.  겸손한 자세로 서서  미사를 올린다.

   3. 성호를 긋는 순서도  카톨릭 교회와는 반대로 한다.

    4. 촛불을 밝히고 향을 피우며 만지거나 입마춤을 하며, 여신도들은 머리에 미사보를 착용한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다른 건물들처럼 소실될 위기에 처했다고 한다.

당시 레닌그라드 포위전에서는 성 이삭성당의 황금 돔이 지나치게 눈에 띄어서

독일군에게 표적으로 이용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소련측은 성당의 돔을 회색으로 덧칠하였단다.

 

 

황금색 돔은 100kg이 넘는 금을 녹여 만들었는데

이 종탑 건설에 참여한  기술자중 40여명이 수은중독으로 사망했으며,

    성당 전체로는 공사기간중 기술자와 인부등 약2천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페테르부르크가 물위에 세워진 도시인 관계로

늪지대 건축이라 성당밑에는 지반을 튼튼하게 하려고

총 2만4천 개의 유약칠을 한 자작나무 말뚝을 박고

 그 위에 화강암, 석회암을 깔아 만들었다 한다.

그리고 64개에 이르는 원통 대리석은 이탈리아에서 가져 온 것이며

출입문은 9톤의 청동주물로 만들어져 있다고 한다.

 

 

성당앞을 장식한  핀란드산  붉은색 대리석은

무게가 125톤으로 말 120만 마리가 동원되었다고 한다.

 

내부 사진은 한티님 블로그에서 퍼 왔다.

 

이코노스타시스의 황금의 성문 안에 계시는 예수님의 스테인드글라스

 

이코노스타시스

이코노스타시스는 동방 정교회의 성당내에서 지성소와 회중석을 구분하는 일종의 칸막이로,

 여기에 이콘을 거는데 그리스어로 <이콘을 거는 칸막이>라는 뜻이다.

건물의 본체와는 별도로 격자의 나무틀에 판을 붙여서 만든 대형의 패널상의 것이 보통으로,

폭은 당내의 좌우 측벽에 접하며, 높이는 천장 근처에까지 이른다.

중앙에 수막과 허리높이의 문을 가진 아름다운 문 또는 <왕문>이라고 하는 개구부가 있다.

 이 문을 출입하면서 사제가 집행하는 의례에 의해서 성스러운 세계(지성소)와 현세(회중석)가 연결된다.

 이콘은 회중석에 면하는 측에 일정한 질서하에 걸려있다.

 이코노스타시스의 성립시기는 9~10세기경이라고 한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이코노스타시스의 초록색 기둥은 우랄산맥에서 생산되는 귀한 공작석

 

 성당의 내부에는 천정에서 내려오는 둥근 자연채광 아래

22명의 예술가들이 참여해 성서의 내용과 성인을 묘사한 150점의 작품들이 그려져 있고

1200개의 조각으로 만든 62개의 독특한 모자이크 프레스코화가 전시되어 있다.

 내부의 화려함이 바티칸의 베드로성당과 비교 할 만 하다고 한다.

 

 

성모자 이콘화

 

웅장한 금빛의 둥근 지붕이 특징인 이사크 성당은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내부에는 중앙에 있는 카를 브리쵸프의 작품을 비롯하여

최후의 만찬의 모자이크화와 천정의 예수부활의 프레스코화 등

 성서의 내용과 성인을 묘사한 예술가들의 그림이 많이 그려져 있다.

그밖에도 수백점의 동상과 부조가 있다.

 

 

러시아 정교는 성호를 그리스 정교와 반대로 긋는다.

악기를 연주하지 않고 사람목소리(아카펠라)로만 성가를 부르고

 앉지 않고 서서 예배를 본다.

 

 니콜라이 1세 청동기마상

 

 니콜라이 1세(1796.7.6 ~ 1855.3.2) 청동상  1859년 제작

 

러시아의 로마노프 왕조의 황제 파벨 1세와 황후 마리야의 셋째 아들.

맏형 알렉산드르1세의 사후, 다음 형 콘스탄틴이 황위 계승권을 포기하여 즉위,

그 아들은 알렉산드르 2세이다.

 보수주의자로서 폴란드, 헝가리의 혁명을 진압하고

오스트리아와 연합하여 동유럽에 반혁명군을 파견하기도 했다.

 국내에서도 그리스 정교 ,전제정치,민족성의 3원칙하에 철저한 반혁명의 입장을 고수했다.

터키 침략에 대하여 터키를 돕는 영국ㆍ프랑스와 충돌하여

크림전쟁(1853∼1856)을 일으켰으나 패색이 짙은 가운데 사망하였다. 

 

 

니콜라이 1세의 30년 치세는 강권과 억압으로 특정지어진다.

반체제의 가능성이 있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감시와 체포,

그리고 사상의 통제 및 검열을 철저히 수행하게 했다. 

 그리하여 그는 몽둥이 차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동상 중간에 조각되어 있는 여성상은 

 믿음, 지혜, 힘, 공정함을 의인화하여 잘례만이 제작한 것으로

니콜라이1세의 부인과 3명의 딸 모습을 닮았다고.

 

 

여기에도 여름 궁전에서 본 것 같은 옛날 복장을 하고

유료로 같이 사진 찍어 주는 사람들이 있다.

 

 

유럽은 유명한 유적지에서 웨딩 촬영을 많이 한다고 한다.

 

 

니콜라이 1세 기마상 뒤에는 궁전 건물이 하나 있는데

니콜라이 1세가  결혼 선물로  딸인 공주에게 지어 준 별궁인데, 

 지금은 시청사로 사용하고 있다.

  

아스또리야 호텔과 독일대사관 건물

 

 

이삭성당의 니콜라이 1세 광장에서

보이는 카잔성당의 돔

 

 

운하의 도시인 상트페테르부르크

 

 

구소련 정권이 붕괴한 후, 러시아 정교회는 러시아인들의 정신적 지주로서 교세를 다시 늘리고 있다.

  예수승천대축일인 2007년 5월 7일 소비에트 정권의 종교 박해로 인해 분열됐던

 러시아 정교회와 해외 러시아 정교회는 80년 만에 재통합했다.

 

 

988년,  키예프대공국의 블라디미르 대공은

 어느 종교를 믿을지를 신하들과 논의한 끝에 동방정교회에 귀의하기로 결정하고

 동로마제국에서 파견나온 성직자들로부터 세례를 받음으로써,

정교회는 러시아의 국교가 되었다.

그는 훗날 정교회로부터 시성되어 최초의 러시아인 성인이 되었다고 한다.

 

네프스키 대로변의 건물

 

 러시아에 기독교의 복음을 전파한 사람은 성 안드레아였다고 한다.
케사리아의 주교 에프세비오의 기록에 따르면

성 안드레아는 기원후 1세기경 예루살렘의 북동쪽으로 여행을 떠나

흑해지방에서 선교활동을 했는데,

후에 그의 선교지는 키예프와 노보그라드라는 도시로 발전했다고 한다.

 

카잔성당은 버스 안에서 지나는 길에 찍은 사진들이다.

  

네프스키 대로변의 카잔성당은 

 러시아 정교회에서 추앙하는 카잔의 성모상을 기리기 위해 지어졌으며,

스트로하노프 백작 가문의 농노출신 건축가 바로니킨에 의해

 1801년부터 10년만에 세워진

로마의 성베드로 대성당을 본뜬 네오클래식 양식의 건물이다.

 

 

 

 

카잔 대성당

 

로마를 방문했던 파벨1세는 성베드로성당의 구조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성당을 건축할 것을 명령하였다.

1801년부터 10년후 1811년 9월 27일에 성당 헌정식을 거행 하였다.

 

 

카잔의 성모상이 교회에 모셔져 있으며

이 성당이 완성된 후, 러시아는 나폴레옹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였고,

프랑스군에게서 빼앗은 107개의 군기와 승리의 트로피 등이 보관되어 있다. 

 

 

카잔의 마리아 상은 예수를 안은 이콘인데

쿠투조프가 이끄는 군대가 전장터에 가지고 나갔던 성상이고

 보르디노 전투가 있기전 성직자들이 축복할 때도 이 성상을 가지고  강복했다고 한다.

 

카잔의 성모상 (16세기 모사품)

 

카잔의 성모는 러시아 카잔수호성인으로서

성모 마리아를 그린 러시아 정교회의 가장 거룩한 성화상(이콘) 가운데 하나이다.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도 카잔의 성모상의 모사품들을 제작하여 공경하고 있다.

카잔의 성모상은 수세기 동안 러시아의 수호자로 공경을 받아왔으며, 진품은 1904년에 절도당하여 파손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모스크바상트페테르부르크 두 곳에 소재하고 있는 카잔 주교좌 성당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정교회 성당들이 카잔의 성모에게 봉헌되어 그를 주보성인으로 모시고 있다.

카잔의 성모 축일은 7월 21일과 11월 4일이다.

[출처: 위키백과]

 

 

네프스키 대로쪽으로 넓혀진 반원형의 회랑에는

네오클래식 양식의 94개의 코린트식 기둥이 1m 간격으로 늘어서 있다.

 

내부 사진은 한티님 블로그에서

 

건물 내부에는 19세기 초의 거장들이 그린 이콘이 있고,

 특히 카잔의 마리아 상이 유명하다.

성당이 완성된 후 러시아는 나폴레옹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성당 안에는 프랑스군에게서 빼앗은 107개의 군기와 승리의 트로피 등이 걸려 있다.

 

 

천정 돔

 

 

 

카잔성당은

 나폴레옹을 격퇴한 러시아 군대의 위대한 장군인 쿠투조프의 장례식이 거행되고

쿠트조프의 유해가 안장 된 곳이다.

카잔 성당은 러시아 군의 영광을 상징하고 있는 장소란다.

 

쿠투조프 장군상

 

성당앞 동상은

나폴레옹과의 전쟁때 러시아를 지킨 영웅 쿠투조프 장군 이다.

 

바르클라이 데 톨리의 동상

 

조국전쟁 (1812년 모스크바로 진격한 나폴레옹을 물리친 전투)의 또 다른 영웅

 

 

 현재는 소련 과학 아카데미의 종교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고대 그리스 시대의  종교, 기독교의 기원, 교황 제도의 역사, 종교 재판 등에

   관한 많은 자료를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러시아는 지역에 따라 여러 민족이 살고 있어 소수의 다른 종교들도 공존하지만

 대부분의 러시아 국민들은 정교를 믿는 신자라고 한다.

러시아 정교는 종교적인 믿음뿐 아니라

나라가 위급할 때는 국민을 하나로 모으는 구심점 역할도 하였는데, 

  볼셰비키 혁명이후 공산주의 체제에서도 그 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종교 지도자들과 러시아정교 성당들은 소련정부의 암묵적인 동의하에 활동했을 정도로

러시아인에게는 종교가 뿌리깊은 정신적 지주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