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러시아

푸른 바다. 2013. 11. 4. 16:36

 

북유럽 여행 11, 12일째 러시아

 

 

 

 

 

러시아 국기

 

위로부터 하얀· 파랑· 빨강의 3색기로서,

하양은 고귀함과 진실· 고상함· 솔직· 자유· 독립을, 파랑은 정직· 헌신· 순수· 충성을,

빨강은 용기· 사랑· 자기희생을 나타낸다.

또는 전통적인 해석에서는 3색을 위로부터 각각 천상세계, 하늘, 속세를 가리키는 우주적 개념으로 설명하였고,

 이후에는 3개 동 슬라브국가인 백러시아(지금의 벨라루스)· 우크라이나·러시아의 통합을 상징하기도 하였다.

가로세로 비율은 3:2이다. 원래는 상선에 게양하던 기였는데,

 1705년 1월 20일에 표트르1 세의 영에 따라 국기로서 최초로 인정하였고 러시아혁명 아래에서는 폐지되었다.

소련 붕괴 즈음인 1991년 8월 21일에 제정 러시아의 국기가 국기로서 부활하였고

2000년 12월 25일 국기에 관한 법에 따라 재 제정하였다. 

[출처: 두산백과]

 

유럽지도

 

러시아 지도

 

러시아는 국토 면적이 1,708만㎢로써

한반도의 78배, 미국의 1.8배에 달하는 세계 최대 영토 보유국이다.

 국토 면적이 워낙 방대하다 보니 국토의 동쪽 끝인 추코트반도와 서쪽 끝인 칼리닌그라드 지역간의

시차는 총 11시간이나 된다.

 

 

러시아(Russia)의 정식 국가 명칭은 러시아 연방이며,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해체와 함께 1991년 12월 25일에 성립되었다.

러시아의 인구는 2009년 7월 기준으로 약 1억 4,200만 명이고,

 수도는 모스크바이고 2009년 7월 기준으로 인구는 1,454만 명이다.

그 외 주요 도시로는 인구 475만 명인 상트페테르부르크,

인구 140만 명인 니즈니노브고로드, 인구 140만 명인 예카테린부르크 등이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성 이삭성당

 

종교 분포는 러시아정교회가 75%,

이슬람교가 5%, 그 외 유대교, 가톨릭, 개신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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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트페테르부르크 여름궁전

 

민족 구성은 러시아인이 80%에 달하고,

타타르(Tatar)인이 4%, 우크라이나인이 2%이며,

그 외 140여 개 소수민족이 8.41%를 차지하고 있다.

고려인은 약 20만 명에 이른다.

러시아인의 평균 수명은 2006년 기준으로 남자가 60세이고, 여자는 74세이다.

 


여름궁전

 

러시아는 긴 겨울과, 짧고 서늘한 여름을 가지는 전형적인 대륙성 기후를 나타내는데,

 모스크바 부근은 겨울철 평균기온이 영하 10℃이고, 여름철 평균기온이 영상 16℃이다.

러시아의 서부 및 서시베리아는 평원지역이고,

동시베리아와 남부 캅카스지방은 산악지대를 이루고 있다.

 

여름궁전

 

한국과 러시아의 시차는 모스크바가 서울보다 6시간 느리고,

 3월~10월동안 섬머타임(summer time) 적용시 5시간 느리다.


여름궁전

 

러시아에서 공용으로 사용하는 언어는 러시아어이지만

각 민족공화국은 고유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다.

 

여름궁전

 

러시아의 정부 형태는 대통령중심제의 연방공화제로서

 7개 연방단위로 묶인 총 83개의 연방구성체이다.

국가원수는 2012년 현재 푸틴 대통령이며,

행정부는 내각 총리 1명, 제1부총리 2명, 부총리 7명, 장관 18명으로 이루어진다.

 

모스크바 러시아 하원의회 건물

 

의회는 상·하 양원제로 상원은 임기가 2년으로 168석이고,

 하원은 임기가 4년으로 450석이다.

 러시아의 주요 정당으로는 통합러시아당, 공산당, 자유민주당 등이 있다.

[여기까지 출처: 러시아연방 개황, 2010.11, 외교부]


상트페테르부르크 운하

 

러시아의 중요 수출품으로는

 석유와 천연가스 외에도 알루미늄, 크롬, 니켈 등 광물자원과 

국방산업 제품으로

미그기, T86탱크, 까보프 헬리콥터, AK소총 등 무기류 수출이 많다고 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네바강변

 

화폐단위는 루블로서

2010년 9월 기준으로 1 미국달러는 약 29.5 루블에 해당된다.

유로화가 통용되지 않으므로 루블화로 미리 환전해 가면 편하다.

러시아 입국 비자는 서울에서 12만원이나 주고 받았는데

 내년부터는 우리나라와 상호 비자면제협정이 발효되어 보다 손쉽게 입국할 수 있을 것 같다.

 

 

 연간 8%에 달하는 경제성장과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 유치등으로

러시아의 위상을 올렸기 때문에 현재 푸틴 대통령의 인기가 좋다고 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성 이삭 성당과 니콜라이 1세 청동상

 

WTO(세계무역기구)는 2020년까지

러시아가 세계 10대 관광지로 성장할것으로 보고있으며

 이에 따라 모스크바시 당국은 경제성이 높은 유망한 사업으로서의 관광개발을 중시하고 

국제 이미지 제고와 수도 시민의 생활수준 향상을 위해 2010년까지의 관광개발계획을

마련해놓고 있다고 한다.

 

모스크바 붉은광장

 

 

러시아는 1991년 12월,

알마아타에서 과거 소련연방을 구성했던 15개국(CIS)의 지도자들이 모여서 

소련의 소멸을 공식적으로 선언하고 각기 15개의 새로운 주권 독립국가로 분리 독립 하였다.

이로인해 과거 소비에트 연방때의 영토면적에 비해 국토면적은 많이 줄어들었으나 

 여전히 러시아는 세계최대의 영토대국으로 자리잡고 있다.

 

붉은 광장의 스파스카야 탑과 성 바실리 성당

 

세계 육지의 8분의1을 차지하고 있는 광대한 나라, 

 러시아 정치와 권력의 중심지이자 경제, 문화, 역사의 중요한 기관들이 

모여 있는 곳인 수도 모스크바의 크레믈린 성 앞 붉은 광장이다. 

 

크레믈린 성벽

 

러시아의 서쪽지방에서 저녁밥을 먹으면 동쪽지방에서는 아침밥을 먹을 만큼,

자국 내에서도 시차가 11시간이나 날 정도로

국토가 넓은 러시아 사람들은

 일생의 소원 중 하나가 자신들의 수도인 모스크바에 한번 와 보는 것이라 한다. 

 

 

지금 러시아는 소련연방때와는 달리 국가체제의 성격도 전혀 달라 

공산당 일당지배 원칙을 버리고 국제적 인권과 인류의 보편적 가치규범을 준수하는

서구적 시장 민주주의 국가로 변화하고 있다.

 

모스크바 붉은광장

 

소비에트연방 해체 이후,

 1997년 모스크바 정도 850주년을 계기로 시가지 복원 사업이 추진되면서

 러시아 정교회와 성당등 옛 건물양식이 복원되고 있으며 

중심가도의 명칭도 사회주의 혁명가들의 이름을 딴 거리명칭에서 

옛 재정 러시아 시대의 이름으로 점차 바뀌어가고 있다고 한다.

 

 

바로 한 세대 전 미국과 함께 세계2강 체제를 구축하며 세계의 역사를 지배했던 나라로서,

 또한 우리나라 해방전후사를 통해 6.25전쟁을 일으킨 배후세력으로서의 러시아지만, 

현재는 우주 기술과 국토방위용 현대무기 구입 등 

첨단과학과 기술교류등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21세기 우리나라의 발전을 위한 비전으로 앞으로 추진해야 할 시베리아 가스전 개발과 파이프라인 연결,

시베리아 대륙횡단철도 연결, 연해주 대평원 농업개발문제 등 

우리의 미래와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붉은광장 국립역사 박물관

 

러시아 마피아는 정계와 경제계에 폭넓게 자리하고 있어서

지금도 마피아를 거치지 않으면 사업도 제대로 벌릴 수 없다고 한다.

 

모스크바 아르바트 거리

 

러시아는 전세계에서 가장 영토가 넓은 나라이자 다민족 국가이다.

 그래서 러시아 전통문화 외에 다양한 민족의 문화가 공존하는 국가가 바로 러시아라고 한다

 이곳에서는 러시아 문화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여러 민족의 민속음악,언어와 종교등을 만날 수 있다고 한다.

 주류인 슬라브민족의 전통문화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의 동양권문화와 이슬람문화 등이 공존하는 곳이 이곳이란다.

 

 아르바트 거리의 푸시킨과 나탈리아 부부동상

 

박물관에서, 궁궐에서, 또는 거리와 교량등의 건축물에서 보게되는

과거의 찬란했던 재정러시아의 문화와, 과거 공산체제하에서 발전시킨 군사력,

그리고 광대한 국토와 무한한 천연자원, 잘 교육받고 훈련된 높은 지적 수준의 국민들, 

  선진국이 되기 위한 전제 조건들을 모두 구비하고 있으면서도, 

 구소련 연방이 붕괴된 이후

러시아의 국영기업이 민영화 되면서 모든 것이 헐값에 매각 과정에서

 이를 사들인 신흥 재벌 세력들은 많이 생겨나고,

반면 일반 봉급생활자의 삶의 수준은 상대적으로 낮아져서 빈부격차가 매우 커지고

일반 시민들은 높은 주거비와 생활비로 인해 가난과 고통에서 허덕여야 한다고

가이드가 전해준다.

 

 

 넓은 땅의 절반은 얼어붙은 시베리아 땅인 러시아에

신은 3가지의 축복과 3가지의 저주를 내렸단다.

첫째, 흑미를 발효시켜 만든 흑빵,

둘째, 생활력이 매우 강하고 아름다운 체격과 용모를 갖춘  여자들, 

셋째, 척박한 환경에서의 삶을 유지하는데 꼭 필요한 보드카라 한다.

또한 신이 내려준 3가지 저주는 

첫째, 혹독한 추운 날씨와 기후(10월말에서 3월까지는 계속 눈이오고 5~6월은 많은 비) 

둘째, 못생기고 게으르고 술주정뱅이인 남자들.

셋째, 알콜 중독자를 만들어내는 보드카라고 한다. 

보드카는 러시아 국민들과 뗄래야 뗄수 없는 상관 관계임을 말해준다.

 

 

 러시아인들의 주식은  감자와  양배추, 그리고 흑빵을 많이 먹는다고 한다.

 

 

러시아는  석유 수출 세계 2위, 가스와 석탄 수출 1위, 수자원 2위, 삼림 2위의 지하자원 대국이다.

무한한 지하자원에도 불구하고 국민 대다수가 가난한 이유는

석유수출로 생긴 이익이 국민 대다수에게 골고루 나눠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 석유수출국 10위의 노르웨이가 국채가 0원인 반면

2위인 러시아는 세계에서 국채가 가장 많은 나라이다.

 

너무나 이쁜 러시아 소녀들

 

지하자원이 풍부한 나라이지만 공산품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한다.

공장을 세워도 45%의 세금을 감당하기 어렵고

화재에 대비하는 소방법이 너무 엄격해서 공장설립 허가를 받는데

 1년이나 걸리니 아무나 쉽게 공장을 설립하지 못한단다.

 

 

러시아 여자들은 남자들에 비하여 무척 예쁘고 아름답다.

  다른 인종의 여자와 비교하여 신체에 균형이 잡혀 있다고 한다. 

  유럽 계통의 인종답게 하얀 피부에 작은 얼굴, 깊은 파란 눈에 자연 쌍꺼풀이 되어 있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러시아는 우리나라 20년 전의 모습과 흡사하단다.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줄서기, 새치기, 불신풍조 만연, 주어진 일 외에는 모른 척하는 무사안일주의,

주민(관광객)의 편의보다 통제가 우선시되는 일처리 등

입국에서 출국까지 기다림의 미학을 몸에 익혀야 하는 나라란다.

혹여 괘심죄에라도 걸리면 기다리는 시간이 무한정 길어질 수도 있단다.

 빨리 빨리 문화에 익숙한 우리 정서하고는 맞지 않는 곳으로

만만디로 유명한 중국인들조차 두 손을 다든 곳이 이곳 러시아라 한다.

 

 

세계최대의 넓은 국토를 갖고 있는 러시아는 동서간의 국토길이가 길어

한나라안에서 지방에 따라 11시간의 시차를 갖고 있지만 

 비행 코스는 중국과 몽골을 통과, 거의 직선으로 가기 때문에

 인천에서 9시간30분 밖에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공산주의 시대의 비효율성과 비능률성으로 비행시간에 비해 도착후 

공항 입국 절차에 소요되는 시간이 매우 길다.

앞으로 러시아 국민들은 경쟁과 효율성을 중요시하는 서구식 자본주의 체제로

하루 빨리 전환 할 필요가 있겠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넵스키 대로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에 이어  제2의 도시인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넵스키대로에서는

 매년 6월 셋째주 마다 삼성이 주최하는 대규모 마라톤 대회가 열린다고 한다.

삼성측은 참가하는 시민들에게 공짜 티셔츠를 기증하면서 자연스럽게 

삼성의 글로벌 이미지를 러시아인들의 마음에 심어가고 있다고 한다.

 LG의 경우도 넵스키대로에서 노래자랑 대회를 열면서 경품을 제공하는 새로운 마케팅 기법을 통하여 

기업과 상품의 이미지를 고착화 하는데 나름대로 효과를 거두고 있다고 한다.

 

예카테리나궁전

 

스티브 베리의 소설 호박방을 읽고난 뒤

호박방을 너무나 보고싶었는데 페키지 여행의 한계로 볼 수 없었다.

 

예카테리나 궁전의 호박방 (인터넷에서 퍼옴)

 

러시아인들이 지금까지도

 독일에 분노를 삭히지 못하고 있는 사건 중에 하나가 바로 호박방에 얽힌 사연이다.

 호박방이란 차르스코예셀로에 있는 예카테리나 궁전의 55개 중 하나의 방 이름으로서

14m의 길이와 높이 5m의 하나의 홀 전체를 호박세공품과 그림, 또 금세공품들로 감싼 예술품을 말한다.

  원래는 독일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1세가 샤를로트 왕비를 위해 짓던 방의 장식 패널이었지만 

아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양쪽 부모가 모두 죽자  이 공사를 중단시켰던 것으로,

호박방은 사실은 독일에 존재하던 것이다.

 하지만 군사확충에 지대한 노력을 들이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와

화려한 서구문물을 도입해오던 표트르 1세의 이해관계가 맞물리면서

그 둘은 호박방과 전함 한대를 맞바꾸는 호박방 외교를 단행한다.

호박패널들은 18개의 상자로 포장되어 1717년 중순에 드디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입성하고

1755년 예카테리나 궁으로 옮겨져 재조립 된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포위하면서

차르스코예셀로에 있던 호박방은 독일군에 의해 36시간만에 6톤에 달하는 호박패널이 모두 다 분리되어

쾨니히스부르크(지금의 칼리닌그라드) 성에 200번 소장품이라는 태그로 보존되었다가

연합군 공격으로 성이 폭격을 맞으면서 사라져버린다.

열에 약한 호박이 폭격으로 사라져버린 것인지 아니면 비밀 지하벙커에 숨겨진 것인지

다양한 추측들이 난무했지만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호박을 더이상 기다릴 수 없다 생각한 러시아는

1979년 부터 호박방 복원에 들어간다.

하지만 이런 기특한 문화재, 문물 복원의 의도는 다시 1991년 소련의 붕괴로 길이 막혀버리고

아이러니컬하게도  독일 가스회사 루르가스가 1999년 350만 달러를 기증하면서 다시 복원 작업에 들어가게 된다.

 여하튼 누구의 끈질긴 요구이건 누구의 자발적 선행이건 결국 독일이 주머니를 털어 돈을 마련하고

러시아는 7톤에 달하는 칼리닌그라드산 호박과 꿀벌색 석재들을 긁어모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도시 설립 300년 기념일인 2003년에 맞춰 복원을 마치고

그 화려한 자태를 세계 각국 대표들에게 먼저 선보였다.

 

예카테리나 궁전의 호박방 (인터넷에서 퍼옴)

 

2003년 상트페테르부르크 300주년 기념식 일환으로

세계 정상들은 예카테리나궁의 호박방 오프닝에 참여했다.

 

다양한 색채의 호박이 조화를 이룬 사방의 화려한 벽면은 그야말로 황금빛 보석방을 연출해 낸다.

 50명의 복원 전문가에 의해 24년간 노력 끝에2003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창건 300주년을 맞이하여 62년만에 공개되었다.

이곳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교육을 받았던 러시아 현직 대통령 푸틴과 독일 총리 슈뢰더가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

 총 800만 달러에 이르는 자금이 소요된 복원 작업에서 러시아 정부가 재정난에 부딪히자

러시아산 가스 수입사인 독일 기업이 350만 달러를 지원 공동 복원 작업 끝에 완공된 것이란다.

 

크레믈린성 사원광장

 

 러시아제국

찬란한 문화를 이룬 러시아 제국의 시초는 현 러시아 지역에 존재했던 군소국가 가운데 하나였던 모스크바 대공국이다.

모스크바 대공국은 14세기에서 15세기에 걸쳐 타타르족이나 주변의 루스 국가들과 싸우면서 세력을 확대,

이반 3세때 처음으로 스스로를 차르라고 자처하였다.

차르는 러시아어로, 루스 사회에서는 원래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에 한해서만 사용되었던 칭호이다.

 1453년에 비잔티움 제국이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한 후,

모스크바 대공 이반 3세는 비잔티움 제국의 마지막 황녀를 아내로 맞이하여, 차르라는 칭호를 사용할 수 있는 명분을 얻었다.

 또한 모스크바에 있던 동방정교회의 주교좌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면서,

모스크바는 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의 뒤를 잇는 제3의 로마라는 인식이 생겨나는 등 모스크바 대공국 내에서는

제국을 자부하는 의식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1547년에는 이반 3세의 손자 이반4세가 자신을 전 러시아의 차르라고 하면서,

 모스크바 대공국의 군주는 곧 전 러시아의 군주이며 로마 황제의 계승자임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이 칭호는 단지 국내용에만 머물렀으며, 다른 유럽 국가들에서는 오랫동안 러시아의 군주를 황제도 왕도 아닌,

 단순히 모스크바 대공으로 부르고 있었다.

1613년, 류리크 왕조의 외척인 미하일 로마노프가 원로원에 의해 차르로 즉위하였으나,

 아직 서구는 로마노프 가를 러시아의 황제로 인정하지 않았다.

17세기 말, 차르로 즉위한 표트르 대제가 서구화 정책을 실시하면서,

 러시아는 간신히 유럽의 일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된다.

 표트르 대제가 로마 황제의 정식 칭호인 임페라토르를 러시아 황제의 칭호로 채용하고,

정식으로 러시아 제국이라는 국호를 제정한 것도 이때이다.

 

 

표트르 대제 시절에 러시아는 급격한 서유럽화가 진행되었다.

하지만, 정작 근대화가 필요한 농촌에는 개혁의 바람이 불지 않아 농노제는 폐지되지 않았고,

 예카테리나 대제 시기에는 농노제가 확장되기까지 하였다.

알렉산드르 2세 황제는 본격적인 러시아의 근대화에 착수하였다.

알렉산드르 2세는 내부적으로 개혁이 필요하다는것을 느끼고, 농노 해방령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 농노 해방령은 정작 농노들이 살 토지를 마련해주지 않아,

도시에서는 농민 출신의 빈곤한 노동자들이 등장했다.

그는 농노 해방 이외에도 군비 증강에도 힘을 기울여

귀족과 부르주아, 중산층 자제들에게도 병역의 의무를 부과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알렉산드르 황제는 공화주의자들에 의해 1881년에 암살당하였고,

그의 아들인 알렉산드르 3세는 부황 알렉산드로 2세의 암살에 충격을 받아,

그간 부황이 행했던 대학 자치제 등의 자유주의를 제한하고, 전제 정치를 오히려 더욱 강화시켰다.

알렉산드로 3세가 죽고, 니콜라이 2세가 즉위하였는데 니콜라이 2세 역시 알렉산드르 3세 못지않게 전제 정치를 행하였다. 

그는 러일 전쟁의 패배에 대한 질책과 이에 따른 개혁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이

기병대에 의해서 살해 당한 사건인 피의 일요일사건 등을 맛본 뒤에야 비로소 개혁을 실시하게 된다.

 1906년 4월 24일에 헌법을 제정하고, 두마라는 의회를 설치하였다.

 

붉은 광장의 레닌묘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1917년 차르 정부는 전쟁을 부담할 능력이 없었다.

이에 자유주의자, 기업가, 장군, 귀족 모두가 차르 정부에 등을 돌렸다.

빈곤한 노동자 계층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차르의 퇴진을 원하였으며, 이는 곧 2월 혁명으로 이어졌다.

 결국 니콜라이 2세는 퇴위되었고, 권력은 임시 정부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오래 가지 못했다.

왜냐하면 게오르기 르보프공과 7월에 총리로 취임한 케렌스키는 연합국과의 약속을 깨지 말자는 이유로 휴전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쟁 상황은 러시아군에게 매우 불리했다. 러시아군은 여전히 동맹국군에게 계속 패배하고 있었고,

식량은 여전히 부족했기 때문이다.

소비에트(혁명 위원회)는 임시정부가 성립되었음에도 해산하지 않았고,

그 중 블라디미르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파는 민중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았다.

1917년 10월 볼셰비키는 수도인 페트로그라드를 장악하고, 소비에트라는 이름으로 집권하였다.

1918년, 볼셰비키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서 독일과의 불평등 조약을 맺음으로써,

국내외적인 고립에서 벗어나고자 하였으며, 동시에 제정을 지지하는 세력을 격파하여야만 했다.

볼셰비키는 1920년 1,300만명의 희생자를 내고 내전에서 승리하였다.

러시아 제국은 이로써 소비에트 연방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러시아제국 글 출처: 위키백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네바강변

 

유럽을 향한 창이라고 시인 푸시킨이 표현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 국민들로부터 추앙받고 있는 차르 표트르 대제가  

1703년 서구 유럽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화려한 수도 건설을 원하여,

많은 인명과 물자의 손실을 감수하면서도 새 수도를 건설하였다.

1713년 모스크바에서 천도하여 1918년까지 러시아 제국의 수도였다가 

 1918년 공산혁명과 함께 수도는 다시 모스크바로 옮겨졌다.

2002년  현재 469만 4000명이 살고 있으며,  유럽에서는 네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로

  레닌그라드 주의 행정,문화,교육및 상업중심 도시이다.

 

표트르 대제 (표트르 1세)

 

 표트르 대제는 1672년 5월 30일,

로마노프왕조를 세운 미하일의 손자이자 2대 황제 알렉세이1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알렉세이에게는 표트르 말고도 자녀가 많았다.

 표트르가 겨우 세 살때 알렉세이1세가 죽자 왕위는 가장 연장자였던 이복형 표도르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병약한 표도르는 6년 만에 죽었고, 차기 황제는 일단 표트르로 결정됐으나

이를 반대한 이복누나 소피아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 쿠테타는 결국 소피아의 동생인 이반과 표트르가 공동황제가 되고,

 소피아가 섭정을 맡는 것으로 낙착됐다.

 

 

표트르 대제(1682-1725)

 

러시아 역사상 최초로 성공적인 서구화를 이끈 지도자는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  영어로는 피터 대제다.

 당시 서 유럽인들은 두 세기 반 동안 몽골의 지배를 받은 러시아를 유럽보다는 아시아에 가깝게 봤다 한다.

 낙후된 러시아는 무례하고 야만적인 사람들이 사는 유럽 변두리의 공국이었을 뿐이었다고.

또한 폐쇄적인 러시아는 다른 나라들과 교역도 하지 않았고, 해군도 부동항도 없었다.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유럽 열강의 식민지가 될 가능성까지 있었다고 한다.

유럽 전역을 휩쓸고 간 14~16세기 르네상스조차  러시아를 비켜갔기에 문화의 낙후국이었다.

 표트르대제는 250여명에 달하는 대 사절단을 유럽 각국에 파견하면서,

스스로도 변장한 채 그 사절단의 일원으로 참가한 사실이나,

조선 기술을 도입하기 위해 영국과 네델란드의 조선소에 변장한 직공으로 취직해 견문을 넓힌 일화등은 유명하다.

떠나기전 '나는 배움이 필요한 학생이다'라고 새긴 인장도 만들어 각오를 다지고,

 조선소 기술뿐 아니라, 병원과 극빈자 수용소를 돌며, 치과의술까지 배워왔다고 한다.

 

표트르 대제의 황후인 예카테리나 1세

 

표트르 대제(표트르 1세)의 두 번째 부인으로, 리투아니아 출신이다.

거기에다 그녀는 귀족 출신이 아닌 평범한 농민 출신이었다.

1698년에 당시 예카테리나와 사랑에 빠진 표트르 1세는 본부인인 황후 예브도키아 로푸히나가

 성정이 너그럽지 못하다는 이유로 황후의 자리에서 폐위시키고 정교회 수녀원으로 강제 추방시켰다.

 그리고 예카테리나는 1712년에 정식으로 황후로 책봉되었다.

1725년 표트르1세가 폐렴으로 서거하였으나,

표트르 1세의 아들인 황태자 알렉세이가 1718년에 반란에 가담하여 황태자 직분을 박탈당한 뒤

고문후유증으로 죽고, 그 아들인 표트르도 아직 너무 어렸기 때문에

표트르 1세의 측근들과 황제 근위대가 황후인 예카테리나를 황제로 추대, 제위에 올랐다.

그러나 2년 간의 짧은 치세로 남편처럼 큰 업적을 이루지 못하고 1727년 43세의 나이로 서거하였다.

표트르 1세와의 사이에서 7명의 자식을 두었으나, 5명은 모두 유아기에 사망하였다.

 살아남은 자식들은 모두 딸들이었는데, 큰딸 안나는 훗날의 표트르 3세를 낳았고,

엘리자베타는 처녀로 훗날 어머니를 따라 역시 여제가 된다.

 

  엘리자베타 여제 

 

표트르 대제가 후계자를 지목하지 못하고 죽은 후 황제의 왕관은 황족들 사이에 이리저리 떠돌다

1741년 표트르 대제의 딸 엘리자베타가 안나여제가 죽자 쿠테타로 즉위하였다.

 현재의 겨울궁전 모습은 표트르 1세의 딸인 엘리자베타에 의해 1767년 재건된것으로

 건축적으로 바로크 양식의 절정기에 해당된다.

 큰 곡선과 넓은 유리창을 과시하며 화려한 장식이 가미된 엘리자베타식 바로크 양식이었고 그 백미가 겨울궁전이다.

엘리자베타 처녀로 왕위에 올라 21년간 재임하는 동안 프랑스 문화에 심취해 있었으며

박물관 이름조차 휴식공간이라는 의미의 프랑스 말 에르미타쥐라 지었다.

 겨울궁전을 재건하는데 막대한 돈이 소요되었다.

그녀는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백성들로부터 더 많은 세금을 거두어야 했으며,

 세수를 늘리는 수단으로 주화의 무게를 늘렸을 정도다.

 궁핍한 생활 속에서 주머니 속의 동전이 무거우면 그만큼 보드카를 많이 마실 것이며,

그러면 저절로 주세가 늘어나 재원 확보가 용이했었다.

그녀의 사치 허영심도 대단해 그녀가 죽었을 때 옷장에서 1만 5천벌 이상의 옷, 구두, 가발 등이 나왔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쥐 박물관(겨울궁전)의 요르단 계단

 

러시아인이 아니었지만 러시아를 사랑했던 여인

이상의 정치를 펼치고자 했지만 현실의 높은 벽을 넘지 못하고

결국은 국민들의 삶을 파탄에 이르게 한 장본인이었지만

표트르대제 이후 가장 부강한 러시아를 만들었고

대외적으로는 전쟁을 통해 러시아 영토를 넓혔으며.

낙후되었던 러시아의 문화를 유럽과의 교류를 통해 향상시킨 인물이다.

지금은 에르미타쥬 박물관이 된 겨울궁전에 모인 미술품들은 모두 예카테리나 치세 때 모은 것들이다.

 

에르미타쥐 박물관 전쟁갤러리

 

에르미타쥐 박물관을

현재와 같은 대박물관으로 발전시킨 인물은 예카테리나 2였다.

그녀는 왕위에 오른 후 프러시아로부터 부채 상환금 대신 225점의 그림을 들여오는 것에서 시작

4천점 이상의 회화작품을 추가로 사들이는 등 수집활동에 열중한다.

이후에도 소장품은 계속 늘어나 회화뿐만 아니라

세계 문명에 관한 귀중한 자료가 궁전에 가득 차게 된다.

 겨울궁전 공간에는 수집된 작품이 전시되어 지고, 이에 부족한 공간때문에 겨울궁전을 증축하였다.

 

 예카테리나 여제 (예카테리나 2세)  러시아의 여황제.

 

영어식 발음으로 캐더린인 예카테리나 2세의 본명은

소피아 아우구스테로서 프로이센 출신의 독일인이다.

표트르 대제의 딸인 엘리자베타 여제의 총애를 받아 이름을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로 개명한 뒤,

1745년 표트르 3세와 결혼하였다.

그러니까 표트르 대제의 손주 며느리가 되는 셈이다.

예카테리나 2세는 결혼후 무능한 남편 표트르 3세를 대신하여 섭정했으며,

  1762년 근위대 사관들을 움직여 쿠데타를 일으켜 남편을 축출하고 로마노프왕조의 8번째 군주가 되었다.

에카테리나는 그 이후 나폴레옹이 침입해 오기 직전까지 34년간 러시아를 경쟁자 없이 완벽하게 통치했으며, 

낭비벽과 평생 21명의 애인을 둘 정도로 바람기가 심했으나 국사를 정력적으로 수행한 황제였다.

보통 아침 5시에 일어나 10~15시간씩 업무를 처리했다.

그녀는 볼테르등 많은 계몽주의 사상가들과 교분을 가지면서 스스로 계몽 전제군주로 자처했다.

대외적으로는 팽창정책을 계속해 폴란드를 분할 점령하는가 하면,

두차례나 오스만 터어키와 싸워 이겼고, 크리미아 칸국을 병합함으로서 흑해를 지배하는데 성공한다.

 그녀의 통치중에 러시아의 국제적 지위는 크게 높아졌는데,

한편으론 교육을 중시하여 여학교와 의학교 등을 설립하였다.

예카테리나 대제는 말년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젊은시절의 자유주의적 이념에서 완전히 등을 돌렸다.

 또 자신이 러시아에 도입하려했던 자유사상도 강력하게 탄압했다. 

대제는 정신이 불안정했던 아들 파벨과는 불화가 심하였고, 손자 알렉산드르는 편애하여,

  아버지 파벨을 대신하여 왕위에 오르기를 원했지만, 알렉산드르는 아버지를 생각하여 거절했다고 한다.

손자 알렉산드르 1세는 후에 나폴레옹 군대를 물리친 황제이고,

 피의사원 위치에서 암살 당한 알렉산드르2세의 아버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