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쥐 박물관 (겨울궁전)

푸른 바다. 2013. 11. 27. 00:25

에르미타쥐 박물관 (겨울궁전)

 

 

 

 

 

담록색의 외관과 흰색의 기둥이 조화를 이루며, 바로코 양식으로 지어진

  세계 3대 박물관 중 하나인 에르미타쥐 박물관에 드디어 왔다.

이제 이 박물관을 보므로서 세계 3대 박물관 (영국 대영박물관,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을

다 보게 된다는 나름대로의 큰 기쁨이 있다.

물론 세계 3대 박물관에 에르미타쥐를 넣느냐 하는데는 약간의 이설이 있지만,

그래도 로마의 바티칸 박물관을 보았으므로

이제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과 스페인의 프라도 미술관 그리고 대만의 고궁 박물관을 보게 된다면

그랜드 슬럼이 되지 싶다.

 

 

 

역대 황제들의 겨울궁전 부속건물들을 개조한 에르미타쥐 박물관이

네바강을 따라 230m나 길게 이어져 있다.

 

 

 러시아 제국의 영광을 위해 지어졌고, 그 자체가 예술작품인 이 건물은

 러시아에서 일생을 보낸 이탈리아 건축가 바르톨로메오 라스트렐리가 1762년에 건축한 건물이다.

겨울궁전을 중심으로 4개의 건물이 복도로 연결되어 장방형 건물 구조를 하고 있으며,

  총 1095개의 방과 117개의 계단, 2000여개가 넘는 창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 본관인 동궁은 겨울궁전으로 로마노프 왕조 시대의 황궁이다.

 

 

 1784-1787년  

예카테리나 대제는 겨울궁전 옆에 소에르미타쥐와 구에르미타쥐를 건축하고,

라파엘 화랑을, 그리고 1783~1786년에 에르미타쥐 극장을 만들었다.

1799~1851년 니콜라이 황제가 화랑을 하나 추가로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신에르미타쥐다.

그래서 겨울궁전, 소 에르미타쥐,구 에르미타쥐, 신 에르미타쥐, 에르미타쥐 극장

이 5개의 건물이 에르미타쥐 박물관을 이루고 있다.  

 

 

담록색에 흰 기둥, 황금색 문양을 강조한 바로코양식의 화려함,
지붕 위에는 170개가 넘는 조각상이 네바강을 응시하고 있다.  

 

궁전 광장

 

 여러 행사가 열리는 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큰 광장으로

왼쪽에는 에르미타쥐 박물관, 오른쪽엔 구 참모본부가 있다.

참모본부 중앙의 말이 이끄는 전차에 탄 승리의 여신상이 있는 개선 아치로 나가면 네프스키 대로가 나온다.

그리고 광장의 중앙에는 높이 47.5m 무게 600톤인 알렉산드르 원기둥이 서 있다.

원기둥의 천사상은 한장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으며

1834년 나폴레옹군에 대한 전승을 기념하여 알렉산드르 1세에 의해 만들어졌다.

1905년 군대가 비무장한 시위대에게 발포한 피의 일요일의 대학살 현장이며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이루어진 장소이기도 하다.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가장 오래된 미술관 중 하나이며,

유럽 미술품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세계 최대 미술관 중 하나이다.

 

 

 

 

에르미타쥐 박물관 티켓 앞면

 

영국의 대영박물관, 프랑스의 루부르박물관과 함께 세계 3대 박물관으로 손꼽힌다.

하지만  대영박물관과 루부르는 약탈한 문화재나 예술품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오명이 있지만,
에르미타쥐는 수집품에 의해 이루어진 작품들이라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에르미타쥐 박물관 티켓 뒷면

 

 제정 러시아의 황궁이며 황제의 평소 집무실이었던 겨울궁전과

 4개의 건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곳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역사와 문화의 상징이기도 하다.

 

 

유럽 곳곳에서 보이는 삼성 로고가 여기서도 보인다.

 

1층 로비

 

에르미타쥐박물관은

예카테리나 2세의 전용 미술관에서 시작되었으며,

에르미타쥐는 프랑스어의 Ermitage에서 왔다고 하는데 

 Ermitage는 은자의 암자,외진 오두막집, 은둔지의 뜻을 가지고 있다.

 

1층  홀

 

에르미타쥐 박물관의 미술품은 최초 표트르대제의 딸인

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 여제(1741-1761)가 미술품을 수집, 궁전에 전시한 이래

 예카테리나 2세가 유럽에서 4,000여점의 최고 수준의 미술품을 구입하였고,

 이후 소장품이 계속 확대되었으며, 궁전 또한 화려하여 그 당시 황실의 권위를 한눈에 엿볼 수 있다.

 현재 이 박물관에는 조각, 미술품, 발굴품 포함 약 300만점이 비치되어있는데

작품 1점당 1분씩만 감상하더라도 5년의 시간이 소요된다고 한다.

 

1층  로비

 

매년 세계 각국에서 3백만명 이상의 관람객이 이곳을 방문한다.

 현재 에르미타쥐는 예술품 전시만이 아닌 거대한 문화연구센터이자,

국민 예술 아카데미의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들에 대한 배려는 각별해서, 

정부 지원금이 연 운영비의 7% 이하로 줄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18세 이하 연령층의 입장료는 무료라 한다.

 

1층 로비 조각상

 

에르미타쥐가 공식적인 박물관 활동을 시작한 것은 1852년부터다.

에르미타쥐가 제국 박물관에서 국립 박물관으로 바뀐 것은 1917년의 10월 혁명 뒤의 일이다.

이후 국유화된 전국의 개인 컬렉션이 에르미타쥐로 집중되고,

발굴과 탐사로 인한 유물의 발견, 국가 주도의 문화재 매입 등이 이어지면서

 에르미타쥐의 소장 내역은 20세기 한 세기 동안 이전에 비해 무려 네 배가량이나 증가했다고 한다.

 

1층 로비 조각상

 

에르미타쥐 박물관에는

1,095개의 방이 끝없이 이어져 있는 전시 공간에 15만점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이 15만점의 작품들도 에르미타쥐가 소장한 컬렉션 가운데 5%에 불과하다고 한다.

소장 미술품들 중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 미켈란젤로를 비롯하여

램브란트, 루벤스, 모네, 피사로, 밀레, 르누아르, 세잔, 고흐, 고갱, 드가, 쿠르베, 피카소, 마티스와 같은  

세계적인 술가들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서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에 가장 많은 사람이 몰리고 있다고.

 

1층 로비  그리스 로마 조각상

 

원시문화사, 고대그리스, 로마세계, 동방제민족문화, 러시아문화, 서유럽미술, 고화폐

6개 부문으로 나뉘어 소장·공개되고 있다.

 

1층 로비 그리스 로마 조각상

 

1층 로비 그리스 로마 조각상

 

1층 로비  그리스 로마 조각상

 

1층 로비  그리스 로마 조각상

 

로마의 바티칸 박물관에서 본 라오콘상인데 모사품인가 보다.

 

 

 

 

소장예술품이 약300만점으로 한작품당 1분씩만 보아도 5년가량 걸린다 한다.

 작품 수뿐만 아니라 작품의 예술적 수준도 다른 박물관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으며,

 박물관이 된 궁전의 내부 모습은 호화로움의 극치이다.

 

요르단 계단 (중앙계단)

 

 

18세기에는 겨울 궁전에 방문한 외교사절들이 오르내리던 계단으로

대사의 계단으로 불렸다.

19세기에는 매년 1월 황족들이 네바강에서 세례의식을 행하기 위해 이 계단을 이용하였기에

요르단 계단이라고 불렸다.

 

 

 

 

 

 

겨울 궁전과 미술관 내부 전체에 쓰인 금의 양이

얼마나 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수리해야 할 부분은 아주 많아서 정확한 수치를 낼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국가 문장전시실인 대연회실의 경우 복구를 위해 50Kg의 금이 필요합니다.

엄청난 금액이죠. 또한 겨울궁전의 한쪽 면을 칠하는데 약 백만 달러가 듭니다.

대체로 한곳 수리하는데 백만 달러라는 엄청난 돈이 필요합니다."  
(표트로프스키 예르미타시 미술관장 의 KBS 인터뷰 중에서)


 

디치아니   고대 그리스의 올림피아 프레스코화 (천정화)

 

 

너무나 입체적으로 그려져 있는

천정 근처의 조각상으로 보이는 그림들

 

 

 

 

제2차세계대전중 레닌그라드(페테르부르크)는 

900일간 독일군에게 봉쇄된 채 수많은 포탄 공세를 받은 피의 격전지였다.

1941년 6월 22일 독일군이 침공하자 소련정부는 박물관의 소장품들을 열차에 실어

83일(9월 16일까지) 동안 시베리아 지역으로 옮겼다.

그때 기차로 에술품을 피난시키고 남아있던 귀중품들은 모두 지하실로 옮겼다고 한다.
네바강에서 모래를 실어와 지하실 입구를 막고,

 홀과 지붕밑 방을 20미터 높이로 채워 깨지기 쉬운 도자기류를 파묻었다고.

 

 

 

에르미타쥐의 지하 수장고에는 각종 보석류가 소장되어 있는데,

 아주 특별한 경우외에는 공개되지 않는다고 한다.

 

 

 

 

문장관 

 

국가 조직의 상징물이 전시되는 곳

 

 깃발과 방패와 창을 들고 있는 군인상이 있는 문장관

 

 

 전시물들이 교체 되고 있는 상황인지 빈 벽이다.

 

 

1,057개의 방 중 400여개의 방이 일반에게 공개되는데

그 중에서 가장 큰 방이 문장홀이란다.

 

문장관의 샹들리에

 

문장으로 장식된 금 방패판이 샹들리에를 장식하고 있다.

 

문장관 창으로 본 밖의 모습

 

 

문장관을 지나

 

전쟁 갤러리

 

조국전쟁 당시 러시아가 나폴레옹 군대를 물리친 기념으로 만든 갤러리

 

 

1812년 나폴레옹과의 전쟁 당시 참전했던 장군과 전쟁 후 장군으로 승진한 332명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말을 탄 나폴레옹과 비슷하게 그려진 그림들은 황제들의 초상화들이다.

 

알렉산드르1세 황제    1812

 

죠     쿠투조프 원수  1829

 

카잔 성당 앞의 동상 주인공인 조국전쟁의 영웅 쿠투조프 장군이다.

 

 

초록색 빈 자리들은

미처 화가가 그림을 그리기 전에 사망한 13명의 장군들 자리란다.

 

 

전쟁 갤러리의 샹들리에

 

전쟁 갤러리 천정

 

 

 

 

 

게오르기 홀

 

1795년 완공된 게오르기 홀은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이 2세 황제까지 어전회의를 하던 곳이며

공식기념행사가 열리는 곳이다.

 

 

이탈리아에서 직 수입한 백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빨강 휘장 위 금관 위로

프란체스코 델 네로의 승리를 가져온 게오르기의 대리석 부조가 있다.

 

안나 요안나브나의 옥좌

 

황실의 문장인 쌍두 독수리

 

용을 물리치는 성 조지의 부조가 독수리 중앙에 있다.

 

 

용을 물리치는 성 조지의 부조

 

 

게오르기관의 천정과 샹들리에와 바닥의 무늬가 같다고 한다.

 

천정 무늬

 

16개의 다른 목재들로 모자이크된 마루

 

옥좌 이외의 다른 가구가 배치되는 것이 금지된 대옥좌의 방

 

 

 

 

1996년 옐친 대통령에 의해 에르미타쥐는

 대통령 직속기구로 편입되었다.

 

 

예카테리나 대제는 서유럽의 고품격 삶의 양식에 비해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는,

 러시아 귀족들의 생활 문화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 등의 부유한 귀족들과 자본가들은 예술 작품들을 수집하여 개인 화랑에 소장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하지만 당시 러시아는 개인 화랑은 커녕 박물관조차 전혀 없었다.

이에 예카테리나 대제는 황제인 자신부터 화랑을 열기로 마음먹고 다양한 소장품을 구입하기 시작했다.

  초창기에는 그림들을 전시할 곳이 없어 러시아 최초의 박물관인 쿤스카메라에 임시로 보관했다.

그 후 에르미타쥐에 미술관이 설립되면서

카벤첼레 공작(1768), 브를리 남작(1769), 크로자 남작(1772), 나폴레옹의 황후 조제핀(1814) 등의 값진 소장품들을 구입했는데,

 에르미타쥐는 예카테리나 대제때 이미 2,000여 점의 예술작품이 소장된 일류 화랑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러시아 황제 표트르 1세 (피터1세)의 딸이었던 엘리자베타 여왕이 21년간 재임하는 동안

 프랑스 문화에 심취돼 있던 그녀가 프랑스말로 휴식공간이라는 뜻의 에르미타쥐라고 이름 지었다 한다.

  그녀는  이 박물관 건설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국민들로부터 가혹한 착취를 일삼았다고 하며 

 개인생활에서도 극도의 사치를 부려 

그녀가 죽었을 때 옷장에서 1만5천벌 이상의 옷, 구두, 가발 등이 나왔을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러시아 왕실의 법규에 의해 처녀의 몸으로 왕위에 오르면 절대 결혼을 할 수 없었던 터라 

 이에 대한  보상 심리로 극단적인 사치에 몰두했었다는 것이다. 

 

 

그  이후 왕위에 오른 예카테리나 2세 여왕은

   프러시아로부터 부채 상환금 대신 225점의 그림을 들여오는 것에서 시작

 4천점 이상의 회화작품을 추가로 사들이는 등 수집활동에 열중함으로서

 이 박물관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 토대가 되었다고 한다.

 역대 여왕들의 화려한 사치와 현시욕이 국가재정을 파탄나게 하고 민생을 도탄에 빠지게 했지만 

 몇백년이 지난 지금 세계문화재의 보고로서 국가의 위상을 제고시키면서 

 해외의 수많은 달러를 벌어들이는 원천이 되고 있다.

 

 

1796년 예카테리나 2세 사후 그녀의 아들 파벨 1세가 즉위했다.

 그러나 어머니를 여러면에서 증오했던 왕은 겨울궁전마저 싫어해 미술관은 잠시 침체기에 들어갔다.

몇년도 안돼 파벨 1세가 암살당한 후,

미술관은 예카테리나 2세의 손자 알렉산드르 1세를 맞음으로서 다시 중흥기에 들어섰다.

 알렉산드르 1세는 나폴레옹 전쟁을 방어해낸 황제이다.

 

 

미술관 초기에는 예카테리나 여제의 가장 친한 측근만이 미술품들을 감상할 수 있었는데,

  지금도 예카테리나 대제가 공표한 미술관 행동수칙 10개조가 전해진다고.  

 

이 10개조에서 대제의 유머 감각을 알 수 있단다. 
제1조. 칼과 모자와 모든 사회적지위는 문밖에 두고 올 것.
제2조. 파벌주의와 야심 역시 문밖에 두고 올 것.
제5조. 다른 사람의 두통을 유발하지 않도록 점잖고 조용히 얘기할 것.
제6조. 화내거나 과격하게 논쟁하지 말 것.
제7조. 작품 앞에서 한숨 쉬거나 하품하지 말 것.

제8조. 미술품 감상 이외의 하찮은 오락에 한눈 팔지 말 것.

제9조. 즐겁게 먹고, 부축을 받지 않고도 나갈수 있도록 적당히 마실 것.

 

제10조. 이 규칙을 어기는 사람은 벌로 냉수 한컵을 마신 다음,

18세기 러시아의 시인 바실리 트레디아코프스키의 해학적이고 풍자적인 서사시 텔레마쉬드의 한 페이지를 암송할 것. 

예카테리나 2세 도자기 인형

 

 

 

 

다비드   사포와 파온  1809

 

 

 

 

 

 

 

 

 

 

 

 

매고 다니던 가방 사이즈가 박물관 통과 기준 사이즈가 넘는다고 해서

버스에 놔 두고 지갑과 카메라만 들고 박물관에 갔었다.

그런데 아뿔싸! 메모리가 다 되어 사진을 찍지 못해 너무 안타까워 하자

구형 스마트폰으로라도 찍으라고 스마트폰을 빌려 주시고,

또한 서울에서 많은 양의 사진을 전송해 주신 김민숙님께 이 시간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린다.

밑에 사진부터는 구형 스마트폰으로 찍은 사진들이라 화질이 좀 안 좋다.

 

 

 

칼리반 화병관

 

초기에 이 관에는 근대 조각 수집품을 전시하려 의도되었던 곳이었으나,

1850년 아직 노브이 에르미타쥐 건설이 진행되고 있을 시, 이곳에 칼리반 타마 제작소에서

건축가 멜리니코프의 설계로 제작된 벽옥으로 만든 아름다운 화병이 임시로 놓여지게 되는데

초기의 의도가 바뀌어 이후로도 이곳에 남게 된다.

이 칼리반 화병은 한덩어리의 돌에서 제작된데다가 지름 4.5m, 무게19톤의 중량을 가지고 있으며

14년에 걸쳐 시베리아의 거장들에 의해 정련 되었다.

그리고 160마리의 말이 이끄는 마차에 의해 페테르부르크로 옮겨졌다.

 

 

 

 

 

 

 

궁정의 관할하에 있었던 1852년부터 미술관으로서 일부 인사에게,

 혁명 후에는 국유화하여 1920년부터 일반에게도 공개되었다.

353실의 방대한 전시품 중 동궁을 포함하여 125실을 차지하는 서유럽미술의 소장품은

역대 황제에 의하여 수집된 르네상스에서 근세에 이르는 명화에

시추킨, 물로조프 등의 대수집가에 의한 프랑스 인상파와 에콜 드 파리의 작품을 포함하여

세계 제1급 미술관으로서의 면모를 자랑한다.

 

 

 17세기 홀랜드 회화실은 예카테리나 대제가 최초로 구입한 작품이 모여 있는 방이다.

1764년, 그녀는 외교관 블라디미르 돌고루스키를 시켜 베를린에서 플랑드르 화가들의 작품 225점을 구입했다.

 이것이 에르미타쥐 미술관의 시작이었다.

 스스로 말하듯 에카테리나는 탐욕스러운 미술품 수집가였다.

애초에 램브란트나 루벤스의 작품들은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2세 황제에게 팔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는데,

프러시아 왕이 재정난을 겪는 바람에 예카테리나에게 빼앗기고 만 것이라 한다.  

 

 125개의 전시실로 이루어진 서유럽 미술관에는

레오나르드 다빈치, 라파엘, 미켈란젤로, 루벤스, 램브란트, 고흐, 고갱, 피카소의 작품까지

 우리에게 잘 알려진 그림이나 조각품을 볼 수 있는데

특히 렘브란트의 그림은 그 양과 질적인 면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란다.

 

램브란트 유작   돌아온 탕자  1660년 말

 

이 작품은 세계적으로 유명한데,

 단지 이 한 작품을 보기위해 에르미타쥐를 찾아 오는 관광객들도 많다 한다.

 성경의 돌아온 탕자 이야기를 주제로 한 이 작품은,

세상에 나가 방탕한 생활을 하며 세월을 낭비한 둘째아들이 파산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따뜻한 품에 다시 안기는 감동적인 순간을 그리고 있다.

같은 주제를 다룬 다른 화가들과는 달리,

 램브란트는 삶을 낭비한 비극과 어려울 때 인간에게 베풀어지는 사랑의 마음을

눈먼 아버지의 표정과 두 손을 통해 너무나 깊이있고 지혜롭게 그리고 있다.  
그림속에서 아버지의 왼손은 오른손보다 조금 큰데, 
이는 오른손은 섬세한 어머니의 사랑을 그리고 왼손은 아버지의 사랑을 나타낸다 한다.

 

 

램브란트가 죽기전 유작으로 남긴 돌아온 탕자는 

램브란트의 마음을 그대로 나타내는것이라 한다.

램브란트는 어린나이에 성공했고 부를 쌓으며 점점 거만해져 갔는데,

사람들은 그런 거만해진 램브란트를 싫어했고, 

나중에 램브란트는 도박과 유흥을 즐기다 그림이 팔리지 않게 되면서 파산하게 되었단다.

그 뒤 램브란트는 점점 종교에 의지하게 되었다 하는데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이 탕자를 따뜻하게 안아주는 아버지이고,

무릎꿇고 아버지의 품에 앉겨있는 탕자가 즉 자기자신을 보여주는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고 한다.

 

램브란트  그리스도 십자가에서 내리심

 

램브란트   귀걸이를 하는 젊은 아낙

 

램브란트  플로라  플로라의 모습을 한 사스키아의 초상화 1634년

 

램브란트가 자신의 아내인 사스키아를

꽃의 여신 플로라로 분장시켜 그린 그림이다.

램브란트가 가장 유복하고 사랑에 빠져 있던 시절의 그림으로 사스키아는

이 후 곧 죽고 말았다고.

 

램브란트  다나에 1636

 

그리스 신화에서 황금 비로 변해 찿아오는 제우스를 반기는 다나에를 그렸다.

 

램브란트 최고 걸작중의 하나인 이 작품은

 1985.6.15 관람객 속에 섞여 있던 한 정신 이상자가 800cc의 염산을 뿌리고 칼질을 해 손상되고 말았다.

 다행히 그림은 치명적인 손상을 피해 복원실에서 정밀한 복원 작업으로 재생되어 전시되는데,

 이후부터 에르미타쥐 입장객은 물병도 소지할 수 없게 되었다.

 

에르미타쥐 박물관 홈피

 

 

 

 

 

루벤스관   에르미타쥐  홈피

 

십자가에서 내려오심

 

루벤스    Christ at Simon the Pharisee  1618~1620

 

 

 

 루벤스  로마의 자비

 

고대 로마에 페로라는 젊은 여성의 아버지 시몬이 큰 벌을 받게 되었는데,

 그 형벌의 내용은 감옥에 가둔 뒤 굶겨 죽이는 것이었다.

 아버지를 살릴  궁리를 하던 페로는 매일 감옥에 찾아가 간수들이 보지 않을 때

 아버지에게 자신의 젖을 먹여 아버지를 굶어 죽지 않게 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로마의 역사학자 발레리우스 막시무스가 쓴 "로마의 기념할 만한 업적과 기록들"에 나오는 내용인데 

루벤스는 막시무스의 뜻과 같이,  아버지의 생명을 살리는 일이 우선임을 부각시켰다.
 아버지에게 검은 옷을 둘러 그의 처지가 자아내는 비극을,

 딸에게 붉은 옷을 입혀 자식으로서의 뜨거운 사랑을 나타냈다.

 

곳곳에 의자에 앉아 지키는 직원들이 있다.

 

 

 

 

 유명한 작품이 있는 방으로 이동 중에 있는 방들

무수하게 많은 이런 방들의 작품을 둘러 보지 못해 너무 아쉬웠다.

 

 

총27km에 이른다는 관람코스는 미로처럼 되어있어

  미아가 될수 있으니 대열에서 이탈하지 말라는 가이드의 말때문에

일행을 잃어버릴까봐 많이 찍지를 못했다.

 

 

 

무릴리오  개를 데리고 있는 소년  1650년 대

 

공작석(말라카이트)으로 만든 초대형 화병-말라카이트 룸

 

청록색의 신비스러운 빛을 발하는 대리석의 일종으로

 공작석은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알타이 지방에서만 생산되고,

 대개 수천개의 작은 조각을 하나하나 무늬를 맞춰 이어 붙인 다음

벽의 기둥이나 도자기, 테이블 등을 만드는데 쓴다고 한다. 

 

산돼지로 변한 마르스가 어금니로 아도니스를 무는 조각상

 

이때 흘린 피에서 아네모네가 피어 났다고 한다.

 

 

신 (노브이) 에르미타쥐의 가장 큰 세개의 방은  대(발쇼이) 채광창 방으로 통칭된다.

 

 

16세기에서 18세기의 이탈리아 회화와 스페인 회화 전시실인

 말르이 (소) 채광창 방과 발쇼이 (대) 채광창 방

 

 

 이 많은 예술품들은 엘리자베타 여제, 표트르 3세의 부인 예카테리나 2세 등 

여제들에 의해 세계 각국에서 수집되었다고 한다

당시 엄청난 비용을 지불해가며 고귀한 예술품들을 사들이기 위하여 국력이 쇠퇴하기까지 했었지만 

 몇백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이 문화재들이 밑거름이 되어 러시아 문화를 살찌우고 나아가 

세계인들로부터 국위를 선양하며 막대한 관광수입을 끌어모으는 영원한 달러박스가 되었다.

 

 

채광창이 있는 천장의 장식들

 

  라파엘의 성경이라 불리는 라파엘로 회랑 천정화

 

라파엘의 성경이라 명명된 천정화는

성경의 주요 장면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The Raphael Loggias  1483~1520

 

1764~1787년 예카테리나 대제는 궁전 옆에 소, 구 에르미타쥐를 건축하고

겨울 운하를 따라 그것을 연결해 라파엘로 회랑을 만들었다.

이 회랑과 연결된 전시실은 레오나르도 다빈치 홀과 미켈란젤로 홀이다.

 

 

1783~1792년에 걸쳐 라파엘로가 1516~1518년 사이에 바티칸 궁의 회랑에 그린 프레스코화를

모사 하도록 예카테리나 여제가 지시하였다.

이후 라파엘로의 그림과 벽화가 완벽하게 재현된 이 회랑은

미술사적인 가치도 아주 높은 공간이라 한다.

 

 

예카테리나 2세의 흉상

 

 

레오나르도 다빈치 전시실에는

다빈치 그림 2점과 스페인과 이탈리아 화가들의 회화 콜렉션이 있다.

 

 

레오나르드 다빈치  꽃을 손에 쥐고 있는 마돈나 (베누아의 마돈나) 1478

 

레오나르도 다빈치  마돈나와 아기 예수 ( 리트의 마돈나 )1480년대 초반

 

레오나르도 다빈치 전시실의 기둥과 조각상

 

레오나르도 다빈치 전시실의 조각상

 

레오나르도 다빈치 전시실의 조각상

 

 

레오나르도 다빈치 전시실의 천정화들

 

 

 

르네상스 전기의 성화들

 

 

 

프라  안젤리코     성인과 함께 있는 마리아   1420

 

 

 

 

 

 

 

 

 

 

 창밖으로 네바강이 보인다.
 문화의 황금기를 맞은 예카테리나 대제는 이 방에서 손님을 접대하길 좋아했단다.
그때 그녀는 겨울 궁전을 러시아어로 예르미타시(은둔지, 인적이 없는 방)라고 즐겨 불렀다고.
이것이 에르미타쥐 박물관 명칭의 유래가 되었단다.

 

에르미타쥐 박물관의 창으로 바라다 본 자야치섬의 페트로파블로프스키 사원과 첨탑

 

스위스의 건축가인 도메니코 토레지니에 의해 1712년 착공하여 1733년에 완공되었으나

처음에 나무로 지어진 성당은 화재로 소실되고 1850년 철골을 세우고 탑을 만들었다.

첨탑은 표트르 대제의 명에 의해 모스크바 크렘린 내의 이반대제의 종루보다 높이 지어져

페테르부르크에서도 가장 높아 (122.5m) 이정표가 되고 있다.

이곳에는 표트르 대제에서 알렉산드르 3세까지의 로마노프 차르들이 묻혀 있다.

 

파빌리온 전시실 또는 전망의 방

 

르네상스, 고전주의, 모리타니아 양식의 특징을 합하여

장식한 파빌리온 전시실

 

 

에르미타쥐에서 가장 아름다운 방 중에 하나로 손꼽힌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이 방을 작은 에르미타쥐라고 부르며 사랑했던 공간이라고 한다.

특히 12시에 요새에서 쏘는 대포 소리에 샹들리에가

흔들리는 모습을 아주 좋아 했다 한다.

 

18세기 후반 영국의 기계 공학자 제임스 콕스 작품

 

100% 금으로 제작된 공작새 시계 

 

영국에서 만든 공작새 자명종인데, 금빛 찬란한 공작새가 시간을 알려준다. 

  이 시계는 18세기 말, 러시아 장군이자 외교관인 포템킨이 런던에서 구입하여

예카테리나 대제에게 선물한 것이고, 포템킨은 예카테리나의 애인이었다 한다. 

 

 

2층 모자이크 방에 있는 황금공작시계는

 한 그루의 금 나무를 심고,

 금으로 만든 공작 1마리와 금 수탉, 올빼미, 다람쥐가 장식되어 있는 시계로

시계를 작동시키면 아름다운 멜로디가 나오며 공작이 날개를 펴고 수탉이 운다고 한다.

특별한 행사가 있을때만 작동 시킨다고 한다.

 

 

위, 아래 사진 에르미타쥐 박물관 판매용 한국어판 책자에서 발췌

 

 

 

 

폴  세잔느    목욕하는 사람들

 

 

 

 

 

 

엘리자베트여제(1742~1762)

표트르대제의 딸

 

예카테리나 2세  (1762~1792)

표트르 3세의 황후

 

파벨1세의 비인 마리야 표도로브나 황후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

예카테리나2세가 규정한 성 예카테리나 훈장의 대리 단장 복장

 

파벨1세는 표트르3세와 예카테리나2세의 아들

알렉산드르1세와 니콜라이1세의 모후

 

 

알렉산드르 1세

 

 니콜라이1세의 비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 1840 크리스티나 로버트슨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3세와 루이제왕비의 장녀 샤를로테공주

 

알렉산드르2세의 비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황후 1840 크리스티나 로버트슨

 

헤센 대공 루드비히2세와 바덴의 빌헬미네의 딸

 

 

 

알렉산드로 3세의 비인 마리 표도로브나 황후 (다그마르 황후)

 

덴마크 크리스티안 9세의 딸로 러시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모후

혁명 후 덴마크로 피신하였고

죽기 전까지 아들 니콜라이 2세 가족들이 어딘가에 살아있다고 믿었다 한다.

1928년 사망후 78년만에 유언에 따라 사랑했던 알렉산드로 3세의 시신 옆에 안장되었다.

 

크류게르  니콜라이 1세의 초상화  1827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 초상화

 

공작석 응접실 장식병과 난로

 

니콜라이 1세의 황후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가 사용하던 곳으로

매우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18세기 공작석은 매우 드물게 사용 되었는데 1830년대 공작석이 대량 매장된 우랄탄광이 개장 된 후

널리 쓰이게 되었단다.

 

니콜라이 1세의 황후 알렉산드라 표도보르나  1836년

 

공작석 응접실

 

공작석 응접실의 원주기둥에는 러시아 모자이크라는 고난도의 기술이 사용되었고

 벽의 한 면에는 낮과 밤, 그리고 시를 의인화한 비유적인 형상으로 장식되어 있다.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가

혁명군에게 붙잡혔을때의 시간 그대로 멈춘 시계

 

 

벨라야 식당과 마지막 식탁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가 볼쉐비키 혁명세력에 의해 체포된 현장으로 

왕조의 마지막을 알리는 시계가 황제가 체포된 시각을  알리고 있다.  

 

 

 

 

 

 

 

 

 

예카테리나 2세

 

2층  테피스트리 전시실

 

 

 

 

 

 성모의 출현  1518~1519  벽포 (벽에 드리우던 장식용 직물) 플랑드르 브류셀 모, 실크

에르미타쥐 박물관 판매용 한국어판 책자에서 발췌 

 

 

 

규방

 

겨울궁전의 응접실중 가장 우아하고 화려한 인테리어다.

 

 

방의 석류빛 천과 창과 문의 휘장들은 프랑스 코티에 공장에

주문하여 만들어졌다.

 

 

황금의 응접실

 

 겨울궁전 내부의 찬란한 금세공품과 금박

 

 

 

 

 

 

 

 

 

 

 

이런 방들이 수없이 많다.

시간상 다 보지 못해 아쉬울 뿐이다.

 

3층 피카소 홀

 

피카소 작품들

 

피카소 작품들

 

피카소 작품들

 

 

파블로 피카소  젊은 부인    1909

 

 

 

피카소   The Visit (두 자매 Two Sister)  1902  청색시대

 

한 명은 수녀, 한 명은 창녀인 자매가 만나는 장면을 표현했다.

1901년부터 1904년까지를 피카소의 청색시대라고 하는데

이시대는 파리의 가난한 청년 미술가 시절이라 불안감과 슬픔을 블루로 표현했다고.

 

 

파블로 피카소    우정   1908

 

피카소   세여인   1908

 

피카소  부채를 들고 있는 여인 (무도회 후)  1908

 

피카소   소년과 개  1905

 

두 점은 에르미타쥐 박물관 판매용 한국어판 책자에서 발췌 

 

피카소  압생트를 좋아하는 여인  1901

 

앙리 마티스   정물화 (Spanish Still Life)

 

 

 마티스   푸른 식탁보   1909

 

 마티스  춤 정물 (Still Life with Dance)  1909

 

앙리 마티스  붉은 방   1908

 

앙리 마티스  화가의 가족들 (가족들의 초상화)  1911

 

앙리 마티스    음악  Music  1910

 

앙리 마티스   라 댄스   1910

 

앙리 마티스   공을 가지고 노는 사람들

 

폴 고갱   열매를 들고 있는 여인  1893

 

고갱   목가적인 타히티 여인들 1892

 

 고갱     타히티 가족   1896

 

고갱    Month Mary    1899

 

고갱    모성

 

고갱   수다   1891

 

폴 고갱   타히티의 일상   1896

 

고갱  기적의 샘물 (달콤한 몽상)  1894

 

반 고흐   아를의 여인    1888년

 

반 고흐   라일락 나무  1889

 

 

밑에 작품들은 에르미타쥐 박물관 판매용 한국어판 책자에서 발췌

크라나크  여성 초상화  1526

 

수르바란  마돈나의 소녀시대 1660년경

 

이오르단스   콩의 왕  1683년경

 

얀 반 다이크 자화상  1620년 말기에서 1630년 초기

 

와토   마음이 쉽게 변하는 여인  1718년경

 

샤르뎅   식사기도  1744

 

 

게인즈 버러   하늘색 의상을 입고 있는 부인의 초상화  1770년대 말

 

프라고나르  짧은 입맞춤  1780년대 말

 

레이놀즈  비너스의 허리를 푸르고 있는 아무르  1788

 

   

고야  안토니아 사라테의 초상화  1811년경

 

 프리드리피    범선에서  1818~1819

 

르누아르  여배우 잔나 사마리의 초상화  1878

 

모네  몽제롱의 못  1876~1877

 

반 고흐  오막살이  1890

 

피사로   겨울 아침의 몽마르트 가로수길  1897

 

폴 시냑  마르셀의 항구  1906

 

앙리 루소   룩셈부르크 공원 쇼팽 기념비  1909

 

마르크  마리나    네아폴  1909

 

칸딘스키 겨울 풍경화 1913

 

블라밍크  센느 강변 풍경  1905~1906  위에것과  바뀌었는지 확인요

 

듀피  보트레이스    도빌 항구의 보트들  1936년경

 

캄펜  마돈나와 아기 그리스도  1430년대

 

라파엘   코네스타빌레의 마돈나 (책 읽는 성 모자)  1504   마졸리카

 

반데르 베이덴   마돈나를 그리고 있는 성자 누가  15C 중엽

 

티티안  다나야  1546년과  1553년 사이

 

조르조네    유디트   1505년

 

티티안   회개하는 막달레나  1565년

 

미켈란젤로관  몸을 웅크리고 있는 소년 1530년대 대리석

 

 미켈란젤로   웅크리고 있는 소년   1530년  대리석

 

이 조각품은 플로렌스의 지배자였던 메디치가문의 지하 납골당에 쓰려고 제작되었으나,

  사용 안하고 있던 것을 구입한 것이다.

 러시아 민중의 고뇌를 예고하듯 깊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소년의 슬픔이 짙게 밴 얼굴이다.

이 작품은 에르미타쥐가 소장한 르네상스시대 미켈란제로의 유일한 작품으로 인기가 높다고 한다.

 

안토니오 카노바  세명의 카리페스 (3미신) 1813~1816 대리석

 

카노바는 이탈리아의 조각가로 신고전주의 대표자로

고대 조각을 연구하고 모방했다.

 

에르미타쥐 박물관 홈피에서

 

사자와 싸우고 있는 헤라클레스  원본으로 추정되는 로마 작품 기원전 330년대  대리석

 

  

로마노소프   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의 초상화  러시아 모자이크

 

 예카테리나 2세 초상화 1770년경

 

 알렉산드르 네프스키의 은 묘  1750~1753   화폐궁

 

13세기 러시아의 장군이며 국가 공신인 알렉산드르 네프스키대공을

 기념하여 만든 피라미드 형식의 은묘이다.

엘리자베타 여왕의 주문에 의해 제작 되었으며 3600파운드의 은이 사용되었다.

좌 우의 천사상은 알렉산드르 네프스키와 표트르 대제의 딸 엘리자베타를 찬양하는 덱스트를 들고 있다.

 

 

 1920년대, 볼세비키혁명 초의 소비에트는 경제적으로 봉쇄상태에 있었다.

 외화 부족을 절감한 당국은 심각한 재정부족을 타개하기 위해 손쉬운 방법을 찾아냈다.

그건  미술품 해외판매 조직이 당국의 비호아래 은밀한 활동을 계속했는데,

 처음에는 해외에서 인기있는 황실의 귀금속등이 대상이었으나,

나중에는 회화, 조각, 출토품등으로 공공연해졌다. 
 1928년에 시작된 1급 예술품의 대량 해외 유출은 1930년 2월에 최고조에 달했다.

은제품 15점과 루벤스의 걸작 헬레나 포먼트의 초상이 단돈 55,000 파운드,

 램브란트와 와토와 테르보르크등의 그림 5점이 단돈 12만 파운드에 팔려나갔다.
이 시기의 미국, 영국, 화란등지에는 러시아의 귀중한 미술품들이 나돌기 시작했다.

  당국이 이 사실을 극비에 부쳤기때문에,

 얼마나 많은 보물이 사라졌는지 아무도 모르다가 겨우 그 일부나마 밝혀진건

90년대초 고르바쵸프 등장 이후였다. 
 
"우리가 갖고 있던 걸작품들이

 워싱턴 국립박물관, 메트로폴리턴 박물관, 암스텔담 박물관으로 보내졌습니다.

그러나 지금 에르미타쥬는 잃어버린 소장품들을 다시 찾으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 표트로프스키 미술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