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모스크바] 모스크바 대학, 참새 언덕, 푸쉬킨 동상, 아르바트 거리

푸른 바다. 2013. 12. 19. 15:52

모스크바

 

 

모스크바 대학, 참새 언덕, 푸쉬킨 동상, 아르바트 거리

 

 

 

 

크레믈린하면

뭔가 음침하고 알 수 없는 음모로 가득찬 무서운 곳일거라고

그동안 연상했었는데 이제 눈으로 직접 보고나니

그것이 얼마나 큰 무지에서 온 편견인지를 알게 되었다.

이토록이나 역사가 깊고 아름다운 곳이리라고는 이 여행을 계획하기 전에는 상상도 못했었다.

이제 앞으로 크레믈린하면

 황금빛과 은빛으로 아름답게 빛나던 꾸뽈들을 연상하게 될 것 같다.

한참동안 강한 감동으로 다가왔던 크레믈린을 뒤로하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나폴레옹도 서서 모스크바시를 조망했다는 참새언덕으로 향했다.

 

모스크바를 관통하고 있는 모스크바강이다.

 

스탈린 고딕양식의 로모노소프 모스크바 대학 건물

 

정식 명칭은 M.V.로모노소프 모스크바국립대학교이고 약칭은 ‘MSU’이다.

 줄여서 로모노소프대학교라고도 한다.

 1755년 1월 25일 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 여제가

시인·과학자·언어학자·계몽사상가인 미하일 로모노소프의 대학 설립 제안을 받아들여

 칙령을 내렸고 같은 해 4월 26일 개교하였다.

 1940년 미하일 로모노소프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붙인

현재의 정식 명칭으로 바꾸었다. [출처: 두산백과]

 

참새(레닌)언덕에서 본 로모노소프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졸업생 또는 교수로 노벨상을 수상한 대표적인 인물은

 러시아의 정치가로서 구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최초의 대통령을 지내고 1990년 평화상을 수상한 미하일 고르바초프,

니콜라이 세묘노프(1956, 화학), 표트르 카피차 (1978, 물리), 알렉세이 아브리코소프(2003, 물리)이다.

또한 작가 안톤 체호프, 수학자 안드레이 콜모고르프, 러시아 출신의 프랑스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

 물리학자 안드레이 사하로프 등이 졸업했다.  [출처: 두산백과]

 

참새(레닌)언덕 전면에 위치한 로모노소프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모습

 

 30층 규모의 모스크바 대학의 건물 높이는 240m로

 모스크바에 남아 있는 7개의 스탈린양식의 건물 중 최대라고 한다.

스탈린 양식의 건축물은

중앙에 고딕양식의 첨탑처럼 높이 솟은 첨탑 건물이 있고

첨탑 양쪽으로 첨탑보다 낮은 건물들이 대칭을 이루며 서 있는 양식으로

 어느쪽에서 보던 그 형태가 똑 같아 보이는 다면체 건물이라고 한다.

 

 로모노소프 모스크바 국립대학교의 고딕 첨탑

 

모스크바 대학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고

1755년 러시아의 대학자 미하일 로모노소프에 의해 설립된 이래,

25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세계 15위권의 종합 대학교이다.

4,500개의 강의실에 8,000여명의 교수가 3만명의 학생을 가르치는데

지금까지 10여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였다.

 

모스크바 전경이 내려다 보이는 바라뵤비 참새(레닌) 언덕의 트로이카 성당

 

모스크바에서 가장 높다는 레닌언덕이다.

해발 115m의 구릉지에 불과하지만,

모스크바에서는 오스탄키노 텔레비젼 중계탑을 제외하고는 

제일 높은곳이라고 한다.

 

참새(레닌)언덕에서 본 모스크바 전경

 

처음 이곳 명칭은 참새언덕이었으나 1935년부터 레닌언덕으로

바뀌어 불렸다 한다.

 

 

모스크바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모스크바 조망의 으뜸 장소로서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으며,

이 나라의 신혼부부들도 사진 촬영을 위해서 많이 찾아오는 명소라고 한다.

 

 

모스크바에서 산을 구경해 보지 못하는 모스크바 시민에겐

이곳 언덕이 더없이 훌륭한 산 역할을 하고 있다고.

 

루즈니키 모스크바 올림픽대회 메인스타디움

 

소련의 아프카니스탄 침공으로 미국과 서방 세계가 보이코트한 가운데

개최된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대회 메인스타디움으로

총 수용 인원수는 10만명 정도라고 한다.

 

 

숲 사이에 있는 루즈니키 스타디움은 현재

러시아 명문 축구클럽 스파르타크 모스크바의 홈구장으로 쓰이고 있다 한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나폴레옹이 이 언덕에 올라

모스크바를 내려다 보는 광경을 묘사해 놓았다 하는데 너무 오래 전에

읽은 책이라 세세한 사항들은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다만 오도리 헵번과 전 남편 멜 화라가 주연한 영화는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삐에르로 나온 헨리 폰다보다 안드레이 공작으로 멋있게 나온 멜 화라를 보고

왜 헵번이 프린스턴대학 출신의 멜 화라에 반해 결혼까지 했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던 영화였기 때문이다.

 

 모스크바의 아르바트 거리

 

모스크바에서의 마지막 일정인 이 곳 아르바트 거리에서

 자유시간 50분을 받아 기념품 가게와 거리를 돌아 보았다.

 

 

아르바트 거리는 모스크바의 귀족들이 모여 살던 곳인데

지금은 보행자 전용 도로로 많은 거리공연들과 화가들이 있는

문화예술의 상징이 된 곳이다.

 

 

약 2km정도 되는 아르바트거리는 지난 1980년대

 러시아 최초로 예술인을 위한 차 없는 거리로 지정됐다.

 

 아르바트거리에 있는 푸시킨과 나탈리아의 동상

 

러시아인의 정신적 지주이자 러시아 국민 시인으로 추앙 받는

푸시킨과 그의 아내 나탈리아 동상이곳 아르바트거리의 입구에 자리하고 있다.

 푸시킨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1999년에 세워진 동상으로,

기념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줄을 서서 기다리는 곳이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푸시킨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픔의 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늘 슬픈것
모든 것은 순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다시 그리워지나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하거나 서러워하지 말라
절망의 나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 반드시 찾아오리라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언제나 슬픈 법
모든 것은 한 순간에 사라지지만 가버린 것은 마음에 소중하리라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며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이니
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설움의 날은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은 오고야 말리니

 

알렉산드르 푸시킨 (1799.6.6~ 1837.2.10, 38세의 나이로 사망)

 

 제정 러시아가 예술적으로 유럽의 변방이라

러시아어로는 변변한 작품이 없어 아무런 인정도 받지 못할때,

푸시킨이 등장하여

러시아어도 문학분야에서 유럽에서 제대로 대접받게 되는 계기가 되었기에,

지금도 푸시킨은 아무도 부정하지 못하는 러시아 최고의 문인으로 추앙 받고 있다.

 

 

푸시킨과 결혼하기 전부터 러시아 상류 사회 사교계의 꽃이었던 곤차로바는,

 결혼 후 프랑스 망명귀족 조르주 단테스와의 염문설에 휩싸였다.

단테스는 끈질기게 푸시킨의 아내 곤차로바에게 구애했고 이는 당시 러시아 상류 사회 최대의 화제로 떠올랐다.

 푸시킨의 모욕감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아내와 자신의 명예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 푸시킨은 단테스에게 결투를 신청했지만,

단테스가 나탈리아 곤차로바의 언니와 결혼함으로써 결투 신청은 없던 일이 됐다.

 그러나 단테스의 구애는 계속되었고, 더구나 푸시킨에게 익명의 편지가 배달되기 시작했다.

 ‘아내에게 배반당한 남자가 된 것을 축하한다’는 식의 악의에 찬 조롱이었다.

푸시킨은 단테스의 양아버지 네덜란드 공사 헤케른이 편지를 쓴 것으로 보고

그를 비난하는 편지를 보냈고, 결국 다시 결투를 벌여 부상당해 38세의 젊은나이에 죽었다.

그러나 이 결투가 러시아 궁정 내부 세력이 푸시킨을 제거하기 위해 꾀한 음모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다.

 

 

 꽃다운 16살 소녀 곤차로바를 처음 만나 정열을 불태웠던 푸시킨은

매혹적인 자태의 아내 나탈리아 곤차로바와 1831년에 결혼해 네 명의 자녀들을 두었지만

 1837년2월10일 아내 나탈리아를 짝사랑하던 단테스와의 결투로 부상하여  세상을 떠났다.

(곤차로바는 1844년 재혼).

 

알렉산드르 푸시킨과 그의 아내 나탈리아 곤차로바

 

2월 9일과 10일에 걸쳐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이카 12번지 주변에 

결투 후 부상 당한 푸시킨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민들 2만여명이 모여들었다.

이에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는 크게 놀라 명령을 내렸다. 

‘장례식 장소를 비밀리에 변경할 것, 일반인의 장례식 참석 엄금, 가족과 친구들만 참석 가능,

군대는 비상 대기할 것, 황실 주치의를 보낼 것, 불법 결투를 벌였지만 사면할 것, 신문의 과격한 추모 기사는 엄금.’

 

거리의 악사

 

많은 연인들이 이 동상에 찿아와 사랑을 맹세한다고 한다.

 

알렉산드르 푸시킨

 

푸시킨의 옆 얼굴 부조 아래

알렉산드르 세르게에비치 푸시킨이 살던 집이라고 쓰인 돌판

 

러시아의 국민 시인 푸시킨 기념 박물관

 

모스크바 출생. 러시아 리얼리즘 문학의 확립자이다.

 명문 중류귀족의 장남으로 외조부는 표트르 대제를 섬긴 귀족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근교의 차르스코예셀로의 전문학교에 다녔으며

졸업 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외무성에 근무하였다.

 

푸시킨 기념 박물관

 

 동상 바로 맞은편 하늘색 건물이 푸쉬킨이 신혼시절 살던 집으로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내부 구경을 위해서는 별도의 입장료를 내야 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활동하다

모스크바로 옮겨온 푸시킨이 그의 아내인 나탈리아와 신혼시절

몇 달을 지낸 집이다.

 

 

푸시킨의 작품은 깊은 사상과 높은 지성으로 일관되게

모두 농노제하의 러시아 현실을 정확히 그려내

이후  러시아 문학의 모든작가와 유파는 모두 푸시킨에서 비롯되었다고 할만큼

영향력이 지대하였다.

 

옆의 철문으로 들어가 보았다.

 

 

러시아에서는 도스토예프스키,톨스토이,안톤 체홉 등 많은 

문학적인 성취를 이룩한 작가들이 많지만 

  러시아 사람들은 푸시킨을 가장 존경하고 가장 좋아한다고 한다.

 

 

아르바트거리는

 러시아 문학의 불후의 명작들이 탄생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푸쉬킨, 고골리, 도스토예프스키,차이코프스키 등이 살았던 곳이라 한다.

 

 

아르바트거리는

우리나라의 인사동이나 대학로 같은 거리이다.

 

 

 15세기부터 존재한 러시아 수도의 거리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거리로

 18세기 나폴레옹으로 인해 파괴되었지만

오늘날 아르바트 거리는 예술이 숨쉬는 거리로 탈바꿈을 했다고.

 

 

 파리의 몽마르트르처럼 거리의 화가들이 그림을 팔고 있다.

 

 

매일 거리의 악사들의 연주 및 무명화가들의 초상화 솜씨를 감상할 수 있고

 또한 러시아 전통공예품, 무명화가의 그림을 파는 노점상, 상가, 유명한 카페와 레스토랑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어,

 모스크바를 찾는 관광객이라면 반드시 들러야 하는 관광코스로 인기가 높다.

 

 

 

나도 여유롭게 앉아 차 한잔의 즐거움을 맛 보고 싶다.

 

 

 

아르바트의 아이들이란 소설로 아르바트거리를 세계적으로 알린

소설가 아나톨리 리바코프의 동상이다. (인터넷에서 퍼옴)

 

러시아 록음악의 전설인 고려인 가수 빅토르 최를 기리는 추모벽

 

1962년 6원21일 카자흐스탄에서 한국인 2세 아버지와 우크라이나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한 아파트 보일러실 화부 출신 한인 3세 빅토르 최는

 1982년 록 그룹 키노를 결성하여 자유를 외치며 이곳 러시아 젊은이들의 우상이 되었다.

 1990년 28세의 나이로 모스크바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혈액형등 자신의 작품을 록음악에 실어 열광하는 10만 인파와 함께 외쳤다.

그로부터 2달 후 서울 공연 초청을 받고 뮤직 비디오를 준비하던 중

대형버스와의 충돌사고로 짧은 인생을 마감한 빅토르 최

 보수파(KGB)가 개입된 암살이란 소문과 함께 5명의 여인이 그를 따라 자살을 하는 등

흥분한 팬으로 인해 장례식이 연기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한다.

이곳 아르바트 거리에서 무명시절 거리의 악사활동했던 적이 있어,

이곳에 그를 추모하는 빅토르 최 추모벽이 설치되었다.

빅토르 최를 기념하는 추모벽인 낙서벽은 아르바트 거리의 한쪽 골목을 차지하고 있으며,

빽빽하게 쓰여진 글들은 빅토르 최의 죽음을 애도하고, 생전의 모습을 기리는 내용이란다.

 

빅토르 최 기념 우표

 

고르바초프는 빅토르 최와 그가 결성한 그룹 KINO를 직접 만나 많은 대화를 나누고,

 손을 앞으로 내밀어 악수를 청하며 힘주어 말했다.

"동지, 페레스트로이카와 인민을 위해 당신의 힘이 필요합니다. 함께 일합시다."
 

보일러실 화부출신의 까레이스키 3세 빅토르 최가 구소련의 개혁개방의 상징으로 본격등장하게 되는데

고르바초프에게 그의 노래와 노래가사는 페레스트로이카의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이것만으로도, 보수파의 대표적인 강경파 KGB로써는 그를 암살할 이유가 충분했다고 한다.
 

1990년 8월15일 토르 최 사망, 바로 다음날,  "아무도 믿지 않는다, 아니 믿고 싶지 않다."
구소련 전체를 흔든 빅토르 최 사망기사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고 모든 진보적 신문들은 그의 사망을 대서특필,

그의 명복을 빌었다고 하는데 보수파(공산당) 신문에서는 언급이 없었다고 한다.

한국 공연 2개월 앞두고 교통사고로 이세상을 떠난 빅토르 최

한국공연을 앞두고 정말 설레하고 좋아했다고 한다.

 

 

< 아르바트거리의 러시아 전통 공예을 진열해 놓은 기념품 가게의 진열대>

 

그 유명한 러시아 황실의 파베르제의 부활절 달걀 모조품

 

파베르제는

1846년 5월 18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프랑스 위그노 교도의 후손인 보석 세공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1870년 아버지의 가업을 이으면서 본격적으로 금·보석 장식품을 만들기 시작해,

 얼마 지나지 않아 제정러시아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 이름이 알려졌다.

전통적인 디자인을 거부하고 파격적이면서도 환상적인 작품들을 만드는 데 전념하였다.

 그의 작품 가운데서도 특히 부활절 달걀은 유명하다.

 

최초의 부활절 달걀은

 1885년 알렉산드르 3세가 황후 페드로브나에게 선물하기 위해 파베르제에게 의뢰해 만든 '암탉 달걀'이다.

그 뒤 달걀 장식품은 매년 부활절 때마다 만들어져 황실 가족과 귀족에게 선물로 전해졌으나,

1917년 10월 러시아혁명이 일어나면서 제작이 중단되었다.

파베르제는 총 50개의 부활절 달걀을 만들었는데, 현재 러시아 크렘린궁에 10점,

 영국 엘리자베스2세가 소유한 3점, 미국의 출판 재벌인 포브스 가문에 9점 등 총 42점이 남아 있다.

 이 가운데 포브스 가문이 소유한 달걀 9점을 포함한 파베르제의 작품 180점이

2003년 러시아의 기업인에게 1억 달러가 넘는 액수에 팔렸다.

 

 파베르제는 1920년 9월 24일 미국 망명 중에 죽었다. 유럽 장식미술의 최고 거장으로 불린다.

 

파베르제 진품 부활절 달걀

 

 파베르제 진품 부활절 달걀

 

 파베르제 진품 부활절 달걀

 

  파베르제 진품 부활절 달걀

 

 나무로 만든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

 

 마트료시카는 러시아어 여자 이름 마트료나의 애칭으로

몸체 속에 작은 인형이 보통 6개 이상 들어가 있는 러시아 전통 인형이다.

 

러시아 목각 인형

 

알 모양에 크레믈린 성이 그려져 있다.

 

 

 

 

 

 

 

모스크바의 성 바실리사원의 모형

 

알 모양에 성화를 그려 넣었다.

  

러시아 로모노소프 황실 도자기 코발트넷 패턴 (예카테리나 2세 패턴이라고도 한다.)

 

1744년 예카테리나 2세 여제에 의해 설립되어

황실을 위해 제작된 로모노소프는 명품 중의 명품으로

러시아 장인들의 100% 수제 핸드 페인팅 도자기이다.

  로모노소프 중 가장 유명한 코발트넷 패턴의 금색 줄은

도금이 아닌 모두 22K 골드를 사용한다.

 

예카테리나 2세는 과학자인 드미트리 로모노소프를

요장에 연금시켜 특별한 도자기를 만들도록 강요하여

러시아 최초의 도자기이자 최고의 도자기를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이에 여제는 만족하지 않고 계속 연금 상태에서 더 나은 도자기를 만들게 했고

그 결과 로모노소프가 만든 도자기는 18세기 말까지 유럽의 최고 도자기가 되었다.

  그러나 혹독한 환경을 견디지 못한 로모노소프는 결국 요절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