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운하투어

푸른 바다. 2014. 10. 15. 22:30

암스테르담 운하투어

 

 

 

 

 

 

여행 제 11일째 이번 여행의 마지막날

독일 쾰른에서 출발해 네덜란드에 도착하여 점심식사를 하고는

비가 오락가락하는 춥고 흐린 날씨 였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풍차마을 잔세스칸스에서

 튤립은 볼 수 없었지만 대신 풍차를 실컷 보고는

네덜란드의 수도인 운하도시 암스테르담으로 향했다. 

이제 곧 보게 될 이번 여행의 마지막 여행지인 암스테르담은

 세계 무역의 중심으로 군림하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본거지로

17세기 막대한 부를 누렸던 도시이다.

잔세스칸스에서 시간을 많이 지체하여 공항 가는 시간을 빼면

운하투어, 담광장 등 일정을 다 소화해 낼런지 걱정이 되지만

그래도 오늘 저녁에는 집으로 돌아 간다는 사실에 감사한 마음이 든다.

모든 여행 일정을 무사히 마치고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이 무척 행복하다.  

 

 

 

풍차 마을 잔세스칸스에서

네덜란드의 수도인 암스테르담으로 가고 있다.

네덜란드는 끊임없이 사회 간접 자본에 투자하는 나라로

세계에서 인구당 가장 긴 고속도로를 가진 나라이다.

 

 

 암스테르담은

네덜란드 서북쪽, 암스텔강이

 에이설호로 흘러들어가는 지점에 축조된 양항으로,

 북해와는 북해운하로 통하고,

 라인강과는 암스테르담-라인 운하로 연결된다.

 

 

 13세기에 어민이 암스텔강에 댐을 설치해서 정주한 것이

 도시명의 기원이다.

 

 

암스테르담에 도착했다.

네덜란드의 주택은 또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암스테르담은

 1367년 쾰른 동맹에 참가한 이래, 라인강 무역의 중심지로서 발달했으며,

 1602년 자바에 동인도회사를 설립하고 네덜란드가

아시아무역을 독점하게 되면서 그 거점으로 번영했다.

 

 

암스테르담은

네덜란드 최대의 도시로 헌법상의 수도지만

행정부와 국가의회는 헤이그에 있다.

 

관광버스의 인상적인 그림

 

 

암스테르담시의 중심은

 여러 개의 운하로 둘러싸인 부채꼴 도시로, 

  남쪽의 담 광장에는 오래된 왕궁을 비롯하여, 제2차 세계대전기념비,

 국왕의 즉위식을 행하는 신교회등이 있고,

안네의 일기로 유명한 안네 프랑크의 집이 서쪽에 있다.

 

 

 동남쪽에는

램브란트(1639∼1658 거주)의 집이 보존되어 있으며

 미술관으로는 램브란트, J.베르메르, F.할스, J.수틴 등의 걸작을 수집한 국립미술관과

고흐의 그림과 네덜란드 근대화를 소장하고 있는 시립미술관이 특히 유명하다.

 

 

암스테르담은

1602년 자바에 동인도회사를 설립하고

 네덜란드가 아시아무역을 독점하게 되면서 그 거점으로 번영하여

17세기에는 세계 최대의 상업도시로서 그 황금시대를 자랑했다.

 

암스테르담시의 트램

 

 트램 레일

 

시티 오브 다이아몬드로 불리는 암스테르담은

 16세기에 벨기에의 안트베르펜에서 도입된 다이아몬드 연마업이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오늘날에는 벨기에의 안트베르펜과 더불어

세계 대부분의 다이아몬드를 연마하고 있다.

 

왼쪽 건물이 코스터 Coster 다이아몬드

 

 

암스테르담에 도착하여 처음 간 곳이

다이아몬드 연마공장을 소유한 상점인

코스터 Coster 다이아몬드이다.

 

 

코스터 Coster 다이아몬드는

 영국 왕관에 쓰이는 다이아몬드연마하는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852년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왕관에 사용된

108.8캐럿의 다이아몬드 코이노르를 연마해 명성이 높아졌다.

 

빅토리아 여왕의 왕관 (108.8캐럿의 다이아몬드 코이노르)

 

 

 

 

평생 처음 보는 진귀한 다이아몬드들

 

 

 엄청난 크기의 연마된 다이아몬드

 

 

 

상품으로 만들어진 다이아몬드 반지

 

 

보안이 철저한 룸에서 다이아몬드 나석과

 

 

세팅된 제품들을 한국인 매니저가 보여 주고 판매하였다.

 

 

모녀가 함께 여행 온 딸의

손가락에 다이아몬드 반지들을 끼워 보았다.

 

 

코스터 Coster 다이아몬드 상점에서 나오자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화장실을 무료로 개방하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오는 것 같다.

 

 

네덜란드는 1949년 7월 25일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하였고,

한국 전쟁 때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해 대한민국을 지원하였다.

 (보병 1개 대대, 군함 1척)

또한 네덜란드는 유럽 국가 중 대한민국에 투자한 최초 국가이기도 하며

IMF 사태 때에도 네덜란드 기업들은 한국을 떠나지 않았다.

 

 

네덜란드의 역사는 물과의 투쟁이라 할 수 있다.

수백년간 파도와 싸워 국토를 가꾸어 왔으며

지금도 여전히 제방에 가장 큰 역점을 두고 있다.

지구 온난화로 수면이 상승하고 있어

260킬로에 달하는 해안선 방어를 위해 수많은 돈을 지출하고 있다.

 

 

 현재 암스테르담 운하는

2010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역사적인 가치를 인정 받고 있다.

 

 벽면이 새와 공으로 장식되어 있는 건물

 

 

 암스테르담 중앙역

 

중앙역 앞으로

 곧게 뻗은 큰 길은 담광장으로 이어지는 담락 거리로

 환전소, 식당, 카페, 쇼핑센터 등 여러 편의시설을 갖춘

암스테르담에서 가장 번화한 곳으로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거리다. 

 

캐날 크루즈

 

중앙역을 마주 보는 곳에서

 암스테르담 운하 투어 크루즈를 탈 예정이다.

 

 

 운하를 따라 유람선을 탈 수 있는데

주로 한 시간 코스를 많이 이용하는 편이다.

유람선은 소요시간,코스 등에 따라 가격이 다르고

  박물관 부근의 선착장에서 타고 내릴 수 있는 뮤지엄 보트도 있다.

 

 

캐날 크루즈의

1시간짜리 운하투어가 시작되었다.

 

자전거 주차장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유난히 많은 도시인

 암스테르담에는 이런 자전거 주차장이 수도 없이 많다.

유럽에서 자전거 타기가 발달된 나라로는

 독일, 네덜란드, 스웨덴 등 여러 나라가 있지만

특히 네덜란드는 인구 1인당 2대꼴로 자전거가 보급되어 있다고 한다.

 

 

  암스텔담의 상징은  XXX 표시다.

도시의 많은 곳에서 XXX 표시를 볼 수 있다.

 트리플 엑스는 자비심, 결단력, 용기를 의미하며 오래된 무역 상업도시의 상징이다.

또한 트리플 X는 성앤드류, 성앤드류의 십자가를 의미하기도 하는데
트리플 X가 암스텔담의 상징이 된것은 1975년 2월 이다.
 

 

유람선 선장님이

국 말로 서툴게 인사를 하여 웃고 있다.

 

 

유머가 많으신 선장님이시다.

 

만석이다.

 

 

서양인, 중국인과 빽빽히 탑승하여

한치의 여유도 없었다.

 

 

배의 창문이 중간에 두개로 나누어진 형태라

사진 찍기가 어려워 맨 뒤에 서서 찍었다.

 

 

 성 니콜라스교회의 돔이다.

 

 

연인들끼리 타는

 2인용 모터보트도 있는 모양이다.

 

암스테르담 과학기술 박물관 Nemo

 

 초록색 배 모양을 한 네덜란드에서 가장 큰 규모의 과학 전문 박물관이다.

 네모(NEMO)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하며

그 이름을 쥘 베른의 소설 해저 2만 마일에 나오는

 네모 선장의 이름에서 착안하였다.

 

 

중국 레스토랑

 

 

처음에는 바다였던 암스테르담을

도시로 개발하기 위해서는 물을 쉽게 빼낼 있는 구조로 만들어야 했는데

  결과 만들어 것들이 바로 암스테르담 운하다.

 

 

재미난 보트 하우스

 

 

암스테르담을 상징하는 것은 운하다.

도로와 운하가 정교하게 짠 거미줄처럼 이어져 있다.

 

 

네덜란드 소년이 마을 제방에 물이 것을 보고

손으로 막아 마을을 구한 이야기를 옛날에 읽었었는데

이야기는 미국의 작가가 허구의 이야기라고

 

 이때 처음 본 셀카봉

 

 

 

 

 

유람선을 타면 부채살처럼 퍼진 운하를 따라

네덜란드적인 고풍스러운 건물들을 볼 수 있다.

 

 

 

네덜란드 특유의 집 모양으로

 대부분이 네오르네상스식의 붉은 벽돌로 지어졌다.

 

 

 

 

오페라 하우스

 

 

암스테르담의 상징인 트리플 X 마크

 

 

마헤레 다리

 

암스테르담 시내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목제 개폐교이다.

다리는 나무로 비교적 단순하게 지어졌기 때문에 낮에 보면 평범하지만

저녁이 되면 조명으로 인해 매우 아름답게 보인다고 한다.

 

1671년 제작된 개폐교 다리인 마헤레 다리

 

 네덜란드는 나라 전체에 운하가 거미줄보다도 더 조밀하게 뻗어 있고,

그런 운하 위의 교통수단으로써 배가 큰 역할을 하기 때문에

배들이 쉽게 지나갈 수 있게 하기 위해 개폐교를 지었다고 한다.

 현대 건축공법으로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이 다리가 지어졌을 당시 1671년에는 획기적인 기술이었단다.

 

 

멀리 암스텔담  남교회의 종탑이 보인다.

17세기 건축된 신교회로 유렵에서의 신구교의 종교 갈등으로 인해

프로테스탄트들만이 예배를 보았던 남교회이다.

 

 

 

부채살모양의 운하 주변에는

 17-18C에 지어진 고급주택가가 형성되어 있다.

 주택의 지붕에는 도르래가 달려 있는데

이는 작은 집들의 좁은 계단으로 이삿짐 나르기가 불편하여

도르래를 이용하여 창문으로 이삿짐을 운반하기 때문이다. 

 

 

 

좁은땅에 많은 사람들이 사는 암스테르담은

 도시를 운영하기 위해 많은 자금이 필요했고 따라서 많은 세금이 필요했는데

건물의 폭과 넓이 , 심지어 커튼 길이까지 단속해서 어기면 세금을 물렸다 한다.

이런 법 때문에 암스테르담 사람들은 폭이 좁고 가파른 계단을 가진

기다란 모양의 건물을 짓게 되었다고.

 

 

운하 아치가 일직선이 되었다.

 

 

 

 

 

운하 주변의 집들

 

 

 

 

 

 

 

 

 

 

암스테르담 어디를 가든 운하가 뻗어있고

그 주변에 네덜란드 양식의 건물들이 즐비하다.

 

 

 

 

볼 수록 맘에 드는 사진이다.

 

 

 

 

 

 

 

 

암스테르담 서교회의 종탑

 

암스테르담에서 가장 높은

바로크 양식의 화려한 85m짜리 첨탑 꼭대기에는

오스트리아 황제인 막시밀리안 1세의 황금 왕관이 보관되어 있어

첨탑 모양을 황제의 관처럼 만들었다 한다.

 

 

암스테르담 서 교회

 

1613년에 시작된 도시계획 이후

 폭발적으로 늘어난 암스테르담 시의 인구로 인해

1620년 시 의회는 서교회와 북교회 두 곳을 신축하기로 결의하였고,

이에 서교회는 헨드릭 데 케이저르의 설계로 1638년 완공되었다.

 서교회의 교인들은 운하 북서쪽에 거주하던

 당시의 재력가들과 지식층들이 주를 이루어

 서민층을 대상으로 건축된 북교회보다 훨씬 화려한 모습을 갖추었다.

 

암스테르담 서 교회

 

암스테르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첨탑은 암스테르담 시의 상징이기도 하며,

 교회 내부에는 “램브란트 이곳에 잠들다”라고 써 있는 묘가 있으나

실제로 어느 묘가 램브란트의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고 한다. 

 

인터넷에서 퍼 온 안네 프랑크 동상

 

램브란트가 묻혀 있다는 서교회 앞의 안네 프랑크 동상

 

안네 프랑크 하우스

 

안네 프랑크 하우스는

프린센 운하 옆에 위치하며 연간 50만 명이 방문하는

 전쟁 메시지를 전하며 전쟁 반대를 호소하는 박물관으로

안네의 일기를 각국어로 번역한 48권의 책과 가족 및 수용소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회전식 책장 뒤에 숨겨진 비밀의 방과 안네가 일기를 쓰던 다락방을 볼 수 있다.

박물관 내부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안네의 일기는

안네 프랑크가 아버지로부터 13세의 생일 축하선물로 받은 일기장에,

2년 동안 숨어지내면서 일어난 일들을 기록한 것이다.

 1942년 6월부터 1944년 8월까지 2년여에 걸쳐 씌어진 이 작품은

소녀의 눈으로 본 전쟁 이야기,

그리고 사춘기 소녀가 맘속에 세상에 대한 희망과 사랑을 담고 몰래 내다본 창문 밖,

이런것들이 어린 안네의 시각으로 쓰여져 있고

사춘기 소녀의 성장과정과 곤경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용기를 잘 표현하고 있다.  

그밖에 이 기간 동안 동화, 단편소설, 수필 등도 썼다.

 

한국어로 된 안내서

 

안네 프랑크는 1929년 6월 12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유대인 가정의 둘째 딸로 출생하였고,

나치스가 유대인을 박해하기 시작하자 1933년 가족과 함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하였다.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제2차세계대전이 시작되고

 1941년 네덜란드를 점령하면서 유대인을 더욱 심하게 탄압하자,

1942년 프랑크 가족은 아버지 오토 프랑크의 식료품 공장 창고와 뒷방 사무실에

  반단씨 가족과 그의 아들이자 안네의 연인인 피터, 의사인 뒤셀씨 등 4명과 은신하게 된다.

그러나 2년이 넘는 은둔생활 중 누군가가 밀고함으로써 1944년 8월 4일

게슈타포에 의해 발각되고 폴란드의 아우슈비츠로 보내졌다.

 1945년 3월에는 하노버 근처에 있는 베르겐벨젠 강제수용소에 보내졌다가

 언니 마고트와 함께 장티푸스에 걸려 사망하였다.

 그 다음해 안네의 아버지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죽음을 당하게 된다.

 

 

 

안네 프랑크의 사망 후

 안네의 일기는 독일이 패망한 후 가족 중 유일하게 생존한

아버지 오토 프랑크가 은둔 했던 집을 찿았을 때 다락방에서 발견하여,

 1947년 네덜란드어로 출판된 이후 각국어로 번역되어

세계적인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이곳을 방문했던 가수 저스틴 비버가 방명록에 남긴

글귀가 한동안 구설수에 오르내렸는데

비버는 방명록에 "이곳 방문은 정말 감동적"이라며

"안네는 정말 멋진 소녀였다"고 적었고,

하지만 "희망컨대 안네가 살았더라면

빌리버(저스틴 비버의 팬클럽)가 됐을 것"이라고

남긴 마지막 글귀가 논란을 불러왔다.

 

 

 

 

 

 

 

 

 

보트 하우스

 

수상 가옥은 지금은 암스테르담의 명물이 되었다.

집세가 비싸다 보니 일부 사람들은

운하의 도시라는 특색을 살려 낡은 배를 수리하여

 전기, 수도, 가스를 끌어 들여 생활하는 주택으로 만들었는데

지금은 그 수가 200가구가 넘는다 한다.

 

 

 

 암스테르담 영화 박물관 EYE 센타

 

 

EYE film museum

 

 

 

 

암스테르담 중앙역

 

 

처음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