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터키 셀축] 에페소 (에페소스 )

푸른 바다. 2015. 7. 8. 11:13

에페소 ( 영어 에페소스 )

 

 

 

 

 

 

그리스, 터키 여행 네째날 2015년 3월 29일 일요일

 

 

차나카레의 트로이에서

 에페소 유적이 있는 이즈미르 주의 셀축으로 가고 있다.

 에페소는 로마시대에 소아시아의 로마 수도 역할을 했던 곳으로

터키에서 로마 유적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먼저 셀축에 도착하면 점심식사를 하고 난 뒤

유명한 가죽제품 내츄럴 상점에서 패션쇼를 보고

에페소 유적지를 관람 할 예정이다.

 

 

 

 

 

지금 가고 있는 셀축은

에게해 연안의 최대 유적지 에페소로 가는 관문의 도시이자

역사적인 기독교 유적지가 있는 곳으로

터키를 여행하는 여행자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관광지이다.

에페소 고고학 박물관이 있고,

 성 요한 교회와 요한과 함께 에페소로 온 후,

성모 마리아가 마지막 여생을 보냈던 성모 마리아의 집도 있다.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여신 아르테미스에게 바쳤던 아르테미스 신전 유적지는

고대 7대 불가사의 건축물 중 하나였다고 하는데,

현재는 모두 파손되어 부서진 기둥 하나만 덩그라니 남아 있다고 한다.

셀축은 소도시로 에페소까지는 걸어서 20분정도 소요될 정도로 가깝다.

 

 

 

 

 

에페소는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에 의해 기원전 6-7세기에 세워진 도시로

예전부터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에게해의 중심도시로 번성했다.

에페소는 그만큼 주인이 여러번 바뀌기도 했는데, 

에페소가 가장 화려했던 시기는 바로 로마시대였다.

로마시대, 아우구스투스 황제때 에페소스는

소아시아 지역 중 가장 중요한 무역항이 되었고

 아시아 지역에서 최고의 도시로 발전했다.

 그러다 강에서 유입되는 토사가 바다를 메우면서 도시로서 기능을 잃고

점차 쇠락하기 시작해 지금의 셀축으로 도시가 옮겨지게 되었다.

 

 

 

 

 

터키의 수많은 유적지중

그리스도교의 유적지로 손꼽히는 에페소는

에게해 지역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고대도시이다.

 

 

 

 

 

BC 7세기경, 에페소는 최전성기를 이루었으며,

 BC 6세기 후반에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으면서부터 쇠퇴하여

페르시아 전쟁으로 해방된 뒤에는 그 영화가 쇠락하기 시작했다.

헬레니즘시대에 이르러 경이롭게 부흥하기 시작했다.

B.C 4세기에 이르러서는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꼽히는

 대 건축이 완성되었으나

 그리스도교 시대가 되자 그 모습은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기원 전 1100년 경

이오니온족인 아테네 왕자 안드로클로스가

토착민들을 추방시키고 건설한 도시 에페소,지금은 흐르는 세월 속에서

그 옛날의 화려함과 위엄을 거의 다 잃어버린

돌무더기 투성이의 황폐한 유적지가 되어있지만

그리스와 로마 시대를 거치며 에게해에서 가장 큰 항구 도시로

번영을 누렸었던 에게 문명의 꽃인 고대도시였다.

 

 

 

 

 

에페소를 관람하는 방법은

크게 언덕 아래쪽인 북문에서 시작해 남문까지 올라가면서 보는 것과

반대로 아래로 내려오면서 관람하는 방법이 있다.

  표는 08:00 ~ 18:30까지 팔고 관람은 08:00~19:30까지 가능하다.

 

 

 

 

 한글로 된 에페소 유적지 안내판

 

입구에 삼성이 10억을 기부하고 세웠다는 소개 간판이 있다.

그만큼 에페소는 하루에 수만명이 방문하는

터키에서 빼놓을수 없는 관광 유적지이다.

 

 

 

 

에페소의 남쪽 출입구

 

유적의 입구는 남쪽과 북쪽 두 군데로

우리는 남쪽 출입구로 들어가 유적지를 둘러보고,

북쪽 출입구로 나가는 내려가면서 보는 코스이다.

 

 

 

 

 

에페소 유적지는

1896년부터 발굴과 복원작업이 시작 되었으나

100년이 지난 지금 현재 30% 정도만 복구되었다고 한다.

 

 

 

 

 

피온의 언덕이라 불리는 높이 150m 정도의 암석터에는

 비잔틴 시대와 헬레니즘 시대의 성벽터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누가의 묘 

 

남쪽 출입구로 들어가면 제일 먼저

성경의 누가복음을 쓴 사도 누가의 묘가 있다.

이 건물은 이오니아식 건축 양식을 따라 사방 16개의 기둥을 세워

16m의 길이로 건축되었다.

1860년 영국 고고학자가 오데온을 발굴하던 중

귀가길에  본 건물의 일부인, 십자가와 황소가 그려진 비석을 보고

누가의 무덤임을 판명했다고 한다.

 

 

 

한국어 안내판있다.

 

누가의 묘 사진은 인터넷에서 퍼 옴

 

 

 

 

 

에페소는 유구한 역사를 지닌 채 오랫동안 폐허로 방치되어 있었다.

이렇게 잊혀진 도시 에페소는 영국과 오스트리아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에페소 유적 발굴은 1859~1874년 영국 대영박물관의 후원을 받은 우드에 의해

원형대극장과 오데온 발굴이 시작되었고

1895년에는 오스트리아의 오토 벤드로프에 의해 아르테미스 신전 발굴이 이어졌으며,

그 후 오스트리아 고고학회의 후원으로 아고라, 아르카디아 거리, 셀수소 도서관 등이 차례로 발굴되었다.

그러나 발굴과정에서 중요한 유물들이 대거 영국과 오스트리아로 반출되었는데,

이에 터키정부는 유물 반출을 엄격히 금지하고 1983년 셀축에 에페소 박물관을 건립하여

전시 공간을 마련하였다.

 

 

 

 

바리우스의 욕장터

 

3개의 아치 문이 있고 돌이 쌓여 있는

바리우스의 욕장터이다.

 

 

 

 

 

바리우스의 욕장 내부에는

대리석으로 만든 냉탕,온탕, 열탕, 탈의실 등의 시설과

공중 화장실까지 있었던 2세기경에 건립된 목욕탕으로

한국의 온돌과 비슷한 하이퍼코스트 방식으로 바닥을 데웠다고 하는데

이 방식은 아궁이에 불을 지펴 열기를

바닥과 벽체 내에 뚫린 통기로를 통해서 배기하는 난방 방식으로

로마시대때 저택이나 목욕장에서 사용되었다고 한다. 

 

 

 

 

바리우스의 욕장터는

2세기에 지어졌는데 1926년에 발굴 되었으며

현재 일부만 발굴된 모습이다.

 

 

 

 

바리우스욕장 앞에 토관이 묻혀 있는 것이 보인다.

수로와 배수관인데

그 옛날에도 토관을 묻어 관리를 했다는게 놀라웁고

 그 토관들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는 것도 놀라웁다.

 

 

 

 

로마의 도시들은

 이런 관을 묻어 상하수도 시설을 완비했다.

 

 

 

 

쌓여 있는 토관들

 

 

 

 

익투스

 

돌 위에 새겨진 그림은 익투스라는 헬라어이다.

이곳 에베소가 그리스도교가 전파된 지역이라

그 당시 박해가 심했던 기독교인들끼리 서로 나누던 암호 표시이다.

가이드는 그림을 가르키며 설명을 해주었는데,

물고기를 뜻하는 익투스 (ΙΧθΥΣ)를  풀어 보면

  Ι : 예수(Ιησουδ)

         Χ : 그리스도(Χριοτοδ)

   Θ : 하나님(θεοδ)

Υ : 아들(Υιοδ)

     Σ : 구세주(Σωτηρ)

즉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라는 뜻이란다.

옛날 기독교 영화들을 보면 물고기를 그려

기독교인임을 서로 알리는 암호로 사용하는 것을 몇번 봤는데

특히 쿼바디스가 생각난다.

 

 

 

 

저기 둥근 원에 선이 그려져 있는데

가이드가 선을 막대로 이리 저리 그으면서 풀어주는데

  Ι   Χ   Θ  Υ  Σ

 이 다섯 글자가 다 포함되어 있는걸 볼 수 있었다.

 

 

 

 

좌측에 오데온이 보인다.

 

 

 

 

 

바실리카는 원래 로마시대의

 법정이나 상업거래소·집회장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인데,

나중에 가톨릭 성당의 원형에 해당하는

바실리카식 성당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아졌다.

 

 

 

 

국영 아고라 터

 

나라에서 운영했다는 국영 아고라는

아우구스투스황제 통치 기간인 AD 1세기에 건립되었고

테오도시우스 황제때 마지막으로 개축되었다.

국영 아고라는 상품 거래가 이루어지는 시장기능 보다는

주로 선거와 집회 등 정치모임과 종교적인 회합이 열렸던 곳이다.

 중심부에는 헬레니즘 시대에 만들어진 이시스신전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저 돌덩이들만 흩어진채 폐허가 되어 있다.

 

 

 

 

국영 아고라 터

 

아고라는

사람이 모이는 곳이라는 뜻으로 시장을 의미하는데

에페소에는 2개의 아고라가 있는데

바실리카 옆에 있는 국영 아고라는 높은 곳에 위치하여  위쪽 아고라,

셀수소 도서관과 원형극장 사이에 있는 상업 아고라는

낮은 곳에 있어 아래 아고라라고 부른다.

 

 

 

 

바실리카

 

오데온과 국영 아고라 사이에는 기둥만 있는 바실리카가 있는데

지금은 부서져서 제 모습을 볼 수 없지만

황소머리 조각이 장식된 이오니아 양식 기둥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이 건물은

 1세기에 만들어 졌는데 바실리카에는 고대의 관공서와 재판소가 있었고,

또한 화폐를 교환하고 상업적 업무를 위하여 사용되는 장소이기도 했다.

이 곳에서 현재 에페소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그의 아내 리비아 황후의 석상도 발굴되었다 한다.

바실리카는 4세기 중반 지진에 의해서 파괴되었다.

 

 

 

 

오데온의 안내판

 

소리나 음을 뜻하는 오디오의 어원이 바로 오데온이다.

 

 

 

 

 오데온으로 들어가는 문

 

 

 

 

 

 

에페소에는 두개의 위원회가 있었는데

시민들이 참여하는 의회는 대형 극장에서 열렸고,

도시의 중요한 문제에 대한 논의와 결정을 하는 평의회는

작은 극장인 오데온에서 열렸으며,

평의회 구성원은 에페소의 귀족 중에서 선발되었다.

 

 

 

 

오데온

 

원래 오데온은 지붕이 있는 소극장으로

AD 150년경 에페소의 부호 푸블리우스 베디우스 안토니우스와

그의 아내 플라비아 파피아나가 세웠으며

 이 곳의 용도는 정치적 의사결정도 하는 평의회 회의장과

 콘서트 홀처럼 음악당으로 사용되었다. 

 

 

 

 

오데온

 

 15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소극장으로

원래 목조 지붕으로 덮여 있었으나 현재 목조 지붕은 소실되고 없다.

객석은 2단 구조의 22개의 단으로 되어 있고

아래의 대리석 좌석은 귀족이나 귀빈의 좌석이다.

 

 

 

 

반원형인 오데온의 오른쪽이 무대가 되고

 반원을 이루는 왼쪽이 객석이다.

 

 

 

 

 오데온의 아치문에서 나오면 시청 (공회당)이 나온다.

 

 

 

 

 

안내판을 보니 시청자리인 플리타네이온에서

풍요의 여신 아르테미여신상이 출토 된 것 같다.

 

 

 

 

 

아르테미여신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는 다이아나라고 불리며

 태양의 신 아폴론과 쌍둥이로 달의 여신이다.

 숲과 언덕, 야생 동물을 수호하고, 수렵을 관장하는 신이며

 또 처녀와 순결을 상징하는 신이었다.

 

 

그런데 소아시아 지방에서는 풍요와 생식의 신으로서,

 오리엔트 세계관에 바탕을 둔 토착적인 대지모신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가슴 쪽에 솟아 있는 많은 유방들은 풍요를 상징하며,

그 밑쪽에 장식되어 있는 야수들의 상은 수렵의 성공을 기원하는 것이다.

그리스 문화 속에서 생성된 여신이 새로운 문화를 만나면서

 토착적인 이미지를 더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당시 에페소스에는 약 5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아르테미스여신의 신전이 있었는데,

이는 이집트 피라미드, 바빌론 공중정원, 올림피아 제우스상,

할리카르나소스 마우솔로스 영묘, 로도스 거상, 알렉산드리아 등대와 함께

 고대 그리스인들이 꼽았던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이다.

 

 

 

 

플리타네이온 (시청, 공회당)

 

오데온을 지나 서쪽으로 가면

고관들의 회의와 리셉션 장소였던 시청이 나온다.

사방은 각각 6개의 돌기둥으로 되어 있는데

광장의 중앙에는 불의 여신 헤스티나의 성화가 항상 불을 밝히고 있었던

아궁이가 있었는데 이 불은 한 번도 꺼진적이 없었다 한다.

 

 

 

 

 플리타네이온은

제의가 거행되고 공식행사와 연회가 거행되던 도시 행정의 중심 건물로

기원전 3세기에 처음 지어졌으며 현재 남아있는 것은

기원후 1세기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의 것이다.

 

 

 

 

병원을 표시하고 있는 고대 로마시대의 조각상

 

플리타네이온 앞에 있는 바실리카거리를 걸어 내려오면

왼쪽으로 도미티아누스 신전과 아스클레피온 병원터의 표식이 보인다.

세계 최초의 병원인 아스클레피온의 출발은

의술의 신인 아스클레피우스로부터 계시를 받아 치료했던 성역으로

의술의 신에게 바쳐진 종합병원이라 할 수 있다.

 아스클레피온의 상징은 뱀 기둥인데,

허물을 벗는 뱀은 생명과 재생을 상징한다.

 

 

 

 

아스클레피오스는

그리스 신화의 의신으로 아폴론과 라피타이족의 왕의 딸 코로니스의 아들이다.

 코로니스가 임신 중에 부정을 저질러 아폴론에 의해 살해된 후, 그 태내에서 꺼냈다고 한다.

 그는 켄타우로스족의 현자 케이론에게 의술을 배워서 명의가 되었다.

반신반인으로 의술에 뛰어나고 온갖 질병의 치료를 주재하였다.

그러나 그 탁월한 의술은 마침내 죽은 자를 소생시키는 힘도 지니게 되어

 그는 자연의 이법이 뒤집히는 것을 두려워한 제우스의 번개로 살해되고,

 뱀자리별이 되었다고 한다.

아내 에피오네간호의 신, 딸 히기네아는 건강의 여신으로 일컬어지고,

다른 두 딸, 두 아들도 의학과 관계가 있다.

 아스클레피오스를 제사 지내는 신전은 그리스의 각지에 있으며 요양소이기도 했다.

 

 

 

 

아스클레피오스는

뱀이 휘감겨 있는 지팡이를 지니고 있는데,

이것이 오늘날 의학의 상징이 되고

 각 국의 병원 의사 마크가 되었다.

 

아스클레피오스가 제우스의 번개를 맞아 죽은 글라우코스를 치료하던 중

 뱀 한 마리가 방안으로 들어왔는데

이에 깜짝 놀란 아스클레피오스가 자신의 지팡이를 휘둘러 그 뱀을 죽였다.

잠시 후 또 한 마리의 뱀이 입에 약초를 물고 들어와 죽은 뱀의 입 위에 올려놓았는데,

 그러자 죽었던 뱀이 다시 살아나고, 이것을 본 아스클레피오스는

 뱀이했던 대로 그 약초를 글라우코스의 입에 갖다 대어 그를 살려내었다.

그리고 그는 존경의 의미로 자신의 지팡이를 휘감고 있는

 한 마리의 뱀을 자신의 상징으로 삼았다.

 

 

 

 

전령의 신 헤르메스

 

병원터를 상징하는 뱀과 지팡이 모습의 부조가 있는

바로 옆에 전령의 신 헤르메스가 부조된 비석이 있다.

헤르메스는 제우스와 마이아의 아들로

올림푸스 12 신 가운데 하나이다. 

전령의 신, 가축의 증식을 관장하는 부와 행운의 신, 꿈의 신,

길을 지배하는 길손의 신, 상업과 교역, 도적의 수호신, 죽은 자를 저승으로 인도하는 신이다. 

그 모습은 일반적으로 젊은 청년으로 표현되어

페타소스라는 날개가 달린 넓은 차양의 모자를 쓰고, 발에도 날개가 달린 샌들을 신었으며,

 손에는 카두세우스라는 전령의 지팡이를 들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현재도 상업관계 학교의 기장 등에 날개와 뱀이 달린 지팡이가 그려져 있는 것은

 상업신으로서의 헤르메스에서 연유한다. 

 로마 신화의 머큐리(메르쿠리우스)와 동일시된다.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와 헤르메스의 카두세우스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는  뱀 한마리이고

전령의 신인 헤르메스의 지팡이는 뱀 두마리에 날개가 달려있다.

 

 

 

 

우리나라 의사협회는 헤르메스의 지팡이로 되어 있다.

지팡이의 교체를 위해 논의가 있다고 하는데...

 

 

 

 

국제보건기구의 지팡이는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다.

 

 

 

 

 

병원이 있었다는 표지석 뒤의

 병원터로 보이는 곳과 폴리오샘의 모습이 보인다.

아스클레피우스가 치료를 할때는 샘(물)이 꼭 있어야 했는데,

치료를 받고 샘물에 목욕을 하고 나면 치유가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스클레피온 병원터 옆에 폴리오샘이 있는 것이다.

 

 

 

 

폴리오의 샘 (Polio Fountain, 물저장고)

 

국영아고라 서쪽에 있는

 크고 높은 아치 형태의 폴리오 파운틴은

폴리오라고 하는 이름이 커다란 아치에 새겨져 있어

폴리오의 샘이라 불리는데

2세기에 처음 지어졌다가 3세기에 재 건축된 물저장고다.

 

 

 

 

폴리오의 샘

 

유력한 귀족이었던 폴리우스가 건립한 물 저장고

에페소로 공급되는 물을 관리하던 곳으로

 인근 3곳의 수원지에서 공급되어

 이곳에서 작은 수도관을 통해 시내 각지로 분배 되었다.

 공용 샘터의 물은 무료였으며,

돈을 내면 집안에도 수도를 설치할 수 있었다고 한다.

고대에도 집안까지 들어오는 수도를

 설치할 수 있었다는 사실정말 놀랍다.

 

 

 

 

폴리오의 무덤으로

에페소에 수도시설을 건립한 공을 기려서

이 곳에 무덤을 만들었다 한다.

 

 

 

 

 

도미티아누스 (도미티안) 신전

 

폴리오샘의 오른쪽 옆으로 도미티아누스 신전이 보인다.

도미티아누스 신전은

로마의 폭군이었던 도미티아누스에게 바쳐진 신전으로

1세기경에 지어진 것이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악명이 높은 폭군 황제였는데

그리스도교를 박해하여 사도 요한을 밧모섬에 유배시킨 황제다.

 

 

 

 

11대 황제 도미티아누스 (재위 81~96)

 

제9대 로마황제인 베스파시아누스의 둘째 아들이며,

 제10대 황제이자 형인 티투스( 39~81)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11대 로마황제로 즉위하였다.

 속주통치와 게르마니아 변경방위 등 외치에 뛰어난 업적을 남겼지만

전제적 경향이 짙은 성격의 소유자로 원로원과의 관계악화로

 사후 모든 기록이 말살되고 비판을 받은 인물로 남았다.

 

 

 

 

황후 도미티아

 

도미티아누스의 개인 가정사는 이혼과 재혼을 하며 복잡했는데

 치세 15년인 96년 근위대장과 결탁한 황후 도미티아에게

포섭된 노예에 의해 암살되었다.

 

 

 

 

도미티아누스 (도미티안) 신전

 

둥근 기초 위에 넓고 높은 테라스가 있었으며

테라스의 북쪽은 높은 이층이어서 계단으로 오르내렸는데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지금 남아 있는 신전의 모습만으로도

그 당시 얼마나 아름다운 신전이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2층으로 지어진 이 신전에는

 토대를 포함해 7m가 넘는 도미티안 황제의 동상도 세워져 있었으나

황제가 암살된 뒤 신전과 함께 동상도 파괴되었으나

주먹을 꽉 쥔 팔은 셀축 고고학 박물관에,

원형이 제대로 남아있는 머리부분은

이즈미르 고고학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여기 유적들 대부분은 셀축에 있는

에페소스 고고학 박물관에서 볼수 있다.

 

 

 

 

 

 

 승리의 여신 니케의 부조

 

도미티아누스 신전 바로 앞 광장 한쪽에 있는

승리의 여신 니케의 부조상이다.

 날개가 달렸으며 왼손에는 승리의 상징인 월계관이,

 오른손에는 종려나무를 들고 있는 이 조각상은 로마시대에 만든 것으로

원래는 크레테스거리에 있는헤라클레스문의 아치를 장식하고 있었다 한다.

스포츠용품으로 유명한 나이키의 마크가

이 니케여신의 치마자락에서 나왔다는 설도 있지만

사실이 아니라는 이야기도 있다.

 

 

 

 

 

멤미우스의 기념비

 

시청을 오른쪽에 끼고 아래쪽으로 더 내려가면

로마의 독재자 술라가 기원전 1세기에 에페소스를 점령하는 장면을 묘사한

멤미우스의 기념비를 볼 수 있다.

 

 

 

 

멤미우스의 기념비

 

로마 공화정 시기(BC5세기 이후 500여년간)에

에페소스는 과중한 세금 부과로 인하여 로마와 관계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에페소스인들은 로마에 대항하여

 이 지역을 차지하려는 폰토스의 왕인 미트리다테스 6세를 지지했다.

미트리다테스는 하루만에 로마시민 8만여명을 무차별 학살할 정도였으나

로마의 최초의 종신독재관이며 개혁가인 술라에게 패하게 된다.

이후 에페소스인들은 미트리다테스의 대학살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막대한 세금을 로마에 내야 했다고 한다.

이 멤미우스비는 그때 대학살 당한 로마인들의 넋을 달래주기 위해 

BC 86년에 술라의 사위 가이우스 멤미우스에 의해 세워졌고

멤미우스는 이 기념비에 장인인 술라에 대한 칭송의 글들을 새겼다고 한다. 

 

 

 

 

 멤미우스의 비는

에페소스에서의 로마의 권위를 상징하기 위한

 술라를 칭송하는 기념비이고,  

이곳에서 죽임을 당한 로마인에 대한 추모비이다.

 

 

 

 

술라 (BC 138? ~ BC 78)

고대 로마제국 장군 겸 정치가로 보수적 성향의 인물이며

로마의 정권을 장악한 후 종신 독재관이 되어

호민관 및 민회의 권한을 축소하고

원로원 지배체제의 회복을 위한 각종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멤미우스 기념비를 지나 

 헤라클레스문을 나오면 크레테스거리가 시작된다.

헤라클레스 문을 기점으로 귀족들과 서민들의 생활하는 공간이 나뉘어 진다.

윗쪽은 관공서와 정치, 경제, 문화를 다루는 곳이라면

아랫쪽은 서민들의 삶이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헤라클레스 문에서 본 크레테스거리

 

크레테스거리는 헤라클레스 문에서

셀수소 도서관까지 에페소의 심장부를 관통하는 거리로

아래 광장과 윗 광장을 잇는 중심적인 도로이다.

길 양쪽에는 상가가 이어져 있었

마차가 다닐 수 없는 보행자 전용도로였다.

 

 

 

 

헤라클레스 문으로부터 이어지는 크레테스 거리는

완만한 경사지로 바닥이 미끄럽다.

수 천년 전의 대리석이 닳고 닳아 반질반질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바닥에 점을 찍어 놓은 것처럼 보이는 것은 

과속방지를 위해 일부러 해 놓은 것이라 한다.

 

 

 

 

헤라클레스의 문 (Gate Heracles)

 

크레테스(크레티아) 거리 입구 양쪽에 세워져 있는

2단으로 된 대리석 석주는 헤라클레스의 문이라고 하는데 

이는 사자의 털가죽을 두른 헤라클레스의 흉상이 붙어 있는

기둥 두개가 나란히 서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 문은 4세기에 운반되어 온 돌기둥으로 만들었는데,

원래는 6개의 기둥에 아치가 있는 2층으로 된 개선문이었다.

현재 보이는 기둥은 아치 위에 있었던 기둥인데 2개만 남아있다.

승리의 여신 니케의 조각상은

 이 헤라클레스 문의 아치장식으로 쓰여진 것이라고 한다.

 

 

 

 

 헤라클레스의 문은

당시 귀족과 서민생활의 경계 지점으로

 다른 문과 달리 폭이 좁은데 이는 수레의 통행을 제한하기 위한 것으로

소음과 도심지의 혼잡 때문에 수레는 크레테스 거리에 들어올 수 없다.

크레테스 거리는 보행자 전용도로이다.

 

 

헤라클레스

 제우스와 페르세우스의 손녀딸 알크메네의 아들이다.

제우스는 페르세우스 집안에서 다음에 태어날 아이로

그리스의 통치자를 삼겠다고 맹세했지만

제우스의 질투심 많은 아내 헤라의 계략으로 병약한 또 다른 아이

에우리스테오스가 먼저 태어나 왕이 되었다.

성장한 헤라클레스는 에우리스테오스를 섬겨야 했고,

 질투심이 강한 헤라의 박해에 시달려야 했다.

결국 헤라가 낸 12가지 과제를 달성해야만 저주에서 풀려날 수 있었던 헤라클레스는

12가지 과제를 풀어냄으로서 더욱 강한 남자로 태어나게 되어

지금도 헤라클레스는 힘의 원천으로 불리워지고 있다.

그가 죽인 사자의 털가죽을 두르고 다니며

사자의 머리를 모자대신 쓰고 다닌 것으로 유명하다.

 

 

 

 

크레테스거리의 바닥에는 대리석이 깔려 있고

기둥 사이엔 글씨가 새겨진 동상받침대들이 있는데

이 받침대 위에는 도시에 선행을 베푼 사람들의 동상과 두상들이 있었다.

누구나 볼수 있는 이러한 장소에 자신의 동상이 세워진다는것은

어느누구를 막론하고 대단한 영광이었다.

 

 

 

 

크레테스란 

로마시대에 종교업무와 행사를 주관하던 사제를 말하는데

이 거리의 양쪽에 사제들의 동상과 유명 인사들의 동상이 있어서

크레테스 거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거의 없어지고

유일하게 남아 있는 의사의 동상도 머리부분은 잘려 나가고 없고,

그 밖에는 받침대만 남아있다.

 

 

 

 

 

트라야누스 분수

 

크레테스 거리를 걸어서 조금 내려오면

 오른쪽으로 트라야누스 분수가 나온다.

 본래는 높이가 12m의 크기였으나 현재는 축소된 크기로 복원되었다.

 

 

 

 

 트라야누스 분수는

트라야누스황제를 기리기 위해

102년~104년에 에페소에 지어진 분수대이다.

12m 높이에 2층으로 된 분수 중앙에는

 실물크기로 만들어진 황제의 석상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받침대와 동상의 오른발만 남아 있다.

 

 

 

 

남아있는 황제의 발

트라야누스 황제의 석상 발끝에서 물이 흘러나와

 귀족계층의 가정과 목욕탕에 물이 공급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로마 황제가 왔을 때는

도시의 열을 식히기 위해 분수대에서 도로에 물을 흘렸고,

거리의 청소를 위해서도 분수대의 물을 이용했다고 한다. 

 

 

 

 

처마로 사용되었던 코니스에

 새겨진 글에는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봉헌되었고

에페소라는 단어앞에 새겨진 "네오코로스" 라는 단어는

도시가 황제의 신전을 만드는 권리를 획득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도시가 네오코로스가 된다는 것은

다른 도시들이 가질수 없는 특권이었다.

 

 

 

 

트라야누스 분수

 

분수의 바닥과 벽이 조금 붉은것에 대한 내력을

가이드가 설명했는

이 에페소를 맡고 있던 총독이 트라야누스 황제가

황후와 공주를 대동하고 이곳에 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때 마침 가물어서 물이 없었단다.

그래서 황제의 가족이 행차를 하시니 급한대로

 포도주를 이곳에 부어 물대신 채워 놓았단다.

물론 황제는 기분이 좋아서 돌아갔고,

 그 이후 이 분수의 바닥과 벽이 포도주에 물이 들어 

붉게 되었다는 것이다. 

 

 

 

 

 

기원전 190년경 로마가 아나톨리아에 진출함에 따라

에페소는 그리스시대에서 로마시대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그리고 에페소는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시대인 AD 100년경에 가장 번성하여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카르타고와 함께

로마의 5대 도시 중 하나가 되었지만

 지금은 폐허로 변하여 문명의 흔적만 남겨진 도시가 되었다.

 

 

 

 

트라야누스의 분수 앞쪽 비탈에는

부유층이 살던 주택들이 들어 서 있는데

3층으로 지어진 것이 많다.

AD 1세기에서 7세기 사이에 건축된

이 집들의 바닥에는 아름다운 모자이크가 장식되어 있다.

 

 

 

 

 모자이크거리

 

트라야누스 분수 건너편쪽으로 보이는 모자이크거리는

귀족들이 드나들던 번화가였다고 한다.

 가이드의 이야기로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파묵칼레에서 온천을 하고 이 곳에 와서 쇼핑을 하고 갔다는 명품거리란다. 

이 상가 뒤 언덕으로는 서민들 중에도 부유층의 주택이 있었다고.

 

 

 

 

 왼쪽 지붕이 있는 가 건물이 테라스 하우스 발굴현장으로

하드리아누스 신전 맞은 편에 있고 모자이크 거리 끝에 있다.

1~ 7세기까지 사용된 여섯 채의 주택 유적이 남아있는 곳으로 ,

로마시대 가정 생활에 대한 정보를 얻는데 중요한 장소이다.

1960년부터 발굴하여 두 채의 집을 복원 완료하여 공개하고 있다.

이 곳은 별도로 입장료를 추가로 받는다.

 

 

 

 

 

명품거리인 모자이크거리 건너편으로

 하드리아누스 신전 옆에서 시작하여 뒷쪽까지 차지하는

큰 목욕탕이 있는데 바로 스콜라스티카의 목욕탕이다.

이 목욕탕은 1세기말에서 2세기초에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4세기에 지진으로 파괴된 것을 부유한 사업가 였던 스콜라스티카라는 여인이

5세기에 다시 3층짜리 건물로 지으면서 비잔틴양식으로 바꾸어 놓았다.

 

 

 

 

스콜라스티카의 목욕탕

 

크레테스 거리 옆에 1세기에 지어진 건물로

전형적인 로마 목욕탕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스콜라스티카의 목욕탕은

 동시에 천여명이 이용할 수 있는 L자 형태로 건축되었으며

탈의실, 온탕, 냉탕,열탕, 휴게실, 체육시설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수세식 공중화장실

 

하드리아누스 신전 옆에 고대의 공중화장실이 있는데.

화장실 사용은 남성 전용이며 유료 화장실이었다.

목욕탕도 사교의 장으로서의 역할을 했지만

 아무런 칸막이도 없이 늘어선 공중화장실도

중요한 정보를 교환하는 장소였다고 한다.

이 화장실에도 고대인의 지혜를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목욕탕에서 사용한 물을 이 곳으로 흐르도록 수로를 연결해서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변기들 앞과 밑으로 흐르게 해 놓아

일을 보고 나면 밑에 있는 오물이 물에 씻겨 흘러 내려가게 하고,

앞에 흐르는 물에서는 손을 씻을 수 있게끔 해놓았다.

 

 

 

 

공중화장실은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다 보니

높은 위쪽 지대를 시작으로 직급이 높으면 위쪽에서,

낮으면 아래쪽에서 볼 일을 봤다고 하며

 겨울이 되면 하인을 먼저 변기에 앉혀 변기를 덮힌 다음

 주인이 일을 보았다고 한다.

 

 

 

 

50명이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이 공중화장실은

 중앙에 연못도 조성되어 있고 또 악사들이 연주도 하기도 해 

용변과 사교를 동시에 해결하는 장소로 사용했다.

 

 

 

 

하드리아누스 신전

 

138년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바쳐진 것으로 규모는 크지 않지만

 코린트식 기둥과 아치의 조각이 아름다운 신전으로

크레테스 거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 중에 하나이다.

AD 138년에 퀸틸리우스에 의해서 건립되어

 AD 128년에 이 곳을 방문했던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봉헌되었다.

 

 

 

 

두개의 아치가 너무나 아름다운 하드리아누스 신전은

조각 하나 하나가 무척 섬세하고 아름답게 새겨져

정말 감탄을 금할 수 없어 한참을 바라보았다 .

 

 

 

 

하드리아누스 신전은

도미티아누스 신전 이후 두번째로 로마 황제에게 바쳐진 신전이다.

입구 중앙에 코린트 양식의 돌기둥 4개가 서있고

 한 가운데 있는 2개의 상부는 아치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앞쪽의 아치의 중앙에는 행운의 여신 '티케(Tyche)가 조각되어 있고, 

 안쪽 아치에는 불행과 악귀를 쫒는다는 메두사가 새겨져 있다.

또한 신전 좌우의 벽에는 하드리아누스가 왕이 되기까지의 과정들을 부조로 새겨 놓았는데

에페소 시민들의 로마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엿볼 수 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AD117~138년에 재위한 황제로

 이 신전은 138년에 건축되었으며,

여기 있는 조각들은

모두 복제품이고 진품은 에페소 박물관에 있다고 한다.

 

 

 

 

 

 

 

 

앞쪽 아치의 중앙에

행운의 여신 티케(Tyche)가 조각 되어 있다.

 

 

 

 

신전 안에 있는 아치에는 아칸서스 잎으로 장식된

 불행과 악귀를 쫒는다는 메두사의 모습이 새겨진 부조가 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메두사

고르곤의 세자매 중 하나로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한다.

메두사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을 사랑했는데

이를 시기한 아테나의 저주로 아름다운 머리카락은 뱀으로 변하고,

그녀와 눈이 마주치는 사람은 돌로 변하게 되었다고 한다.

 

 

 

 

신전 안쪽 프리즈에는

 한쪽에는 아폴로 신과 아테나 여신을 묘사했고

다른쪽에는 안드로클로스, 헤라클레스,

테오도시우스의 아들과 부인 등이 조각되어 있다.

또한 멧돼지를 사냥하는 안드로클로스와 디오니소스 의식행렬

그리고 아마존족 등, 에페소의 기원에 관련된 설화가 묘사되어 있는데

이 부조들은 모조품이고 진품은 에페소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비문 받침대에는

 디오클레티아누스, 맥시미안, 콘스탄티우스 1세,

 갈렐리우스 황제의 동상이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에페소는 지진이 많이 발생하는 지역이라 크레테스 거리를

포함한 많은 곳에서 피해를 입었는데,

특히 4세기에 발생했던 지진 피해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파손된 기둥을 다른 건물에서 가져온 것으로 대체하다 보니

 지금 보이는 거리 모습은  본래 형태가 아닌

4세기 지진 이후 복원된 모습이다. 

 

 

 

 

가이드가 그냥 통과해서 어떤 건물인지 모르겠고

집에 와서 자료를 찿아도 없어서

굉장히 궁금한 곳이다.

 

 

 

 

셀수스도서관 (Library Celsus)

 

하드리아누스 신전을 보고 조금 내려오면

 좌측으로 셀수스도서관이 나온다.

 셀수스도서관은 알렉산드리아, 페르가몬과 함께

고대 3대 도서관 중 하나로 에페소 유적지의 건축물 중

가장 훌륭하다고 평가받는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셀수스도서관

 

  서기 106~107년 로마의 소아시아 총독이며

독서광이었던 율리우스 셀수스 플레마이아누스를 기념하기 위해

로마 집정관이었던 그의 아들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아퀼라가

그의 아버지를 기리기 위하여 135년에 지은 도서관이다.

그러나 도서관을 지으라고 명한 아퀼라는

도서관에 소장될 서적 구입비 2만5천다나르를 남겨둔채

도서관이 완성된 것을 보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중앙 아래 건물 지하에 셀수스 플레마이아누스의 무덤이 있다. 

 

 

 

 

셀수스도서관은

당시 최고의 도서관으로 12,000여권의 두루마리 장서가 소장되어 있어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과 학문의 중심지를 놓고 경쟁을 벌렸다고 한다. 

지금은 많은 부분이 훼손되었지만

1970년 오스트리아 고고학협회에서 대대적인 복원 작업을 하여

전면부는 원형에 가깝게 복원되어 그 화려한 모습을 볼 수 있다.

 

 

 

 

12,000여권의 장서가 보관되어 있던 지식의 창고로

 책들은 파피루스와 양가죽으로 만들어졌고

 책이 눅눅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도서관의 벽은 이중벽으로 하고 벽 사이엔 공간을 남겨 두었으나,

이 책들은 262년 고트족의 침략으로 모두 소실되었다. 

 

 

 

 

2000년이 지난 지금도 화려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16개의 코린트식 기둥의 셀수스도서관

 

 

 

 

에페소는

사도 바울이 2년여를 머물며 그리스도교를 전파한 곳이다.

그래서 이 셀수스 도서관이

성경에 나오는 두란노서원이었을거라고 추측을 한다고 한다.

 사도 바울은 에페소의 두란노서원에서

날마다 에페소 사람들과 토론하며 강론하였다고 하니...

 

 

 

 

지금은 도서관의 정면 입구만 복원된

셀수소도서관의 남아 있는 건축물에서 아름다운 16개의 코린트식 기둥과,

왼쪽부터 지혜(Sophia), 미덕(Arete), 지성(Ennoia), 지식(Episteme)을

상징하는 네명의 여인상을 볼 수 있다.

 이 네 여인상의 진품 오스트리아에서 발굴할 당시 비엔나로 가져가서

오스트리아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여기에는 복제품을 세워 놓았다.

 

 

 

 

셀수소 도서관 전면 벽감에 있는 지혜(Sophia)를 상징하는 조각상

 

 

 

 

미덕(Arete)을 상징하는 조각상

 

 

 

 

지성(Ennoia)을 상징하는 조각상

 

 

 

 

지식(Episteme)을 상징하는 조각상

 

 

 

 

창관과 연결된 통로

 

셀수스도서관 건너편에는 창관이 있는데,

도서관의 지하에 창관과 연결된 통로가 있어 학생들이

 머리도 식힐겸 창관을 드나들었다 한다. 

 

 

 

 

마제우스와 미트리다테스의 문

 

 셀수스 도서관 옆으로 나있는 대리석으로 된 세 개의 문은

 마제우스와 미트리다테스의 문으로

 서민들의 아고라 (시장)로 들어가는 문이다.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노예였던 마제우스와 미트리다테스가

자유인이 된 후 부유한 시민이 되자

그들을 자유의 몸으로 만들어준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그의 아내 리비아,

 딸 율리아, 사위 아그리파를 위해

감사의 표시로 AD 40년 이 문을 만들어 헌정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일명 아우구스투스의 문이라고도 한다.

 

 

 

 

셀수스 도서관에서

상업 아고라로 들어가는 문으로

기원전 1세기에 지어졌으며 전부 3개의 아치로 되어 있다.

 

 

 

 

상업아고라

 

마제우스와 미트리다테스의 문으로 들어서자

서민들의 상업 아고라(광장, 시장)가 보인다. 

 상업아고라는 헬레니즘 시대인

 BC 3세기에 세워졌으며 크기가 110m*110m의 야외시장이었다.

3세기 초에 카라칼라 황제에 의해 확장되었고,

4세기에 있었던 지진으로 인해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아고라에는 세 개의 문이 있었는데

하나는 북쪽에 있는 원형대극장 앞에, 다른 하나는 셀수소 도서관쪽에,

나머지 하나는 서쪽 항구쪽으로 열려 있었다.

 

 

 

 

상업아고라

 

에페소의 두 개 아고라 중 국영 아고라인 윗쪽 아고라에 비해

 아래 아고라라 불리는 상업 아고라는 도시에서 가장 큰 상업지로

이 곳의 상점들은 주랑을 따라 존재하고 있었고,

상점들의 뒤쪽에는 둥근 원통형의 지붕으로 된 창고가 있었으며,

아고라 중앙에는 시장의 개점과 폐점을 알리는

해시계와 물시계가 놓여 있었다고 한다.

 

 

 

 

상업 아고라

 

이곳에서는 도자기와 보석류와 각종 장신구 등

 동서양의 온갖 진귀한 물품들이 거래 되었고,

또한 각지에서 가져온 물건들뿐만 아니라 노예들도 거래가 되었다고 한다.

로마시대에 가장 번성했던 에페소는 부족할 것이 없는 풍요로운 도시였고,

항구도시로서 많은 사람들이 오갔던 만큼 

상업활동도 활발했었을 것이라고 한다.

 

 

 

 

대리석거리 (마블 로드)

 

셀수스도서관에서부터 대극장 (원형극장)까지 이어주는 거리로

길 바닥에 대리석을 깔았다 하여 대리석길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 길은 아르테미스 신전으로 이어지는 성스러운 길의 일부로

1세기에 조성하여 5세기에 재건하였고 길의 서쪽에 있는 상업아고라와는

높은 단으로 된 벽으로 분리되어 있다.

길 아래는 대형 수로가 있었고,

 길 양옆으로는 원기둥과 귀족의 석상이 있었으며

이 길에 황제의 포고문이 게시되어 사람들에게 전달되었다고 한다.

세계 최초의 광고판도 볼 수 있는 길이다.

 

 

 

 

로마시대 창관 (유곽, 창녀의 집)을 알리던 광고 그림

 

대리석 바닥에 새겨진 세계 최초의 광고판으로

여인과 사랑을 나누려면 돈이나 어음을 가지고 발이 향하는 방향으로 오라.

단 발의 크기가 이 발보다 작으면 안된다.

가이드가 이런 뜻을 가진 광고판이라고 하여 일행들이 모두 웃었다.

 

 

 

 

브로델(창관)은 공중화장실과 함께

스콜라스티카 목욕탕의 부속건물로 알려져 있다.

 

 

크기가 20.5m*20.5m의 정원을 둘러싸고 방들과 거실들로 이루어진 창관은

입구 왼쪽에 방문객들이 그들의 옷에서 흙과 먼지를 터는 곳이 있었고,

집들은 재미있는 많은 모자이크들로 장식되어 있었다고 한다.

아름다운 여자들은 지적이고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으며, 자신들 소유의 집이 있었고,

각종 모임이나 선거에도 참석할 수 있는 보통의 로마 여인들이 갖지 못하는 특권을 누렸으며,

또한 자신의 고객을 선택할 권리도 갖고 있었다고 한다.

 

 

 

 

 

분수 하우스

 

원형대극장의 무대 뒷벽에 위치하고 있는데

BC 3~1세기경인 헬레니즘 시대에이오니아 양식으로 만들어졌으며

로마시대에 분수의 규모가 확장되었다.

기둥에 있는 동상의 비문에 의하면

 물은 마르나스강으로 부터 가져왔다고 한다.

 

 

 

 

대극장 (Great Theater)

 

1-2세기 경에 피온 산의 경사면에 지어진것으로

 2만4천명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극장이었다.

시민들이 모이는 집회는 물론 연극과 문화예술 공연이 상연되었는데,

 로마 시대 말기에는 검투사와 맹수의 싸움도 벌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관객석 위에서 바라보면 고대의 항만 유적이 한눈에 들어오기도 하며,

현재도 에페스 문화예술 축제기간 중에는 공연장으로 사용되어

 1년에 한번 정도는 특별공연이 개최된다.

 

 

 

 

대극장으로 올라가고 있다.

 

원형대극장은 에페소에서 가장 웅장한 구조물이다.

아르카디안 거리의 맞은편 판에이르 언덕 기슭에 위치하고 있으며,

헬레니즘 시대인 BC 3세기경 마케도니아의 라시마코스에 의해서 건립되었는데

로마시대에 지금의 모습으로 확장되었다.

 

 

 

 

대극장의 모양은

바닥을 바라보며 부채꼴 모양으로 넓게 퍼져 있으며

헬레니즘시대에 처음 지어졌으나 로마시대에 각 부분이 확장되어

무대에서 극장 꼭대기까지의 높이가 60m에 이르는,

  약 2만5천명의 관중을 수용 할 수 있는 소아시아에서 가장 큰 극장이다.

그러나 계단의 좌석에 쓰였던 대리석들이 후에 다른 건물을 짓는 자재로

사용되는 바람에 원형이 많이 훼손되었다.

 

 

 

 

 지금은 남아있지 않지만

3층으로 된 무대 건물은 18m 높이였으며,

무대의 1층과 2층 건물은 네로황제(AD54~68)때 만들어졌고,

 3층은 셉티무스 세베루스황제(AD193~211)때 만들어졌다.

 무대 정면은 원 기둥과 양각의 부조, 그리고 동상들로 화려하게 장식되었으며,

무대는 높이 2.7m인 귀빈석 위에 있었고,

좌우에 위치한 경사로를 통해 무대에 갈 수 있었다.

 

 

 

 

제일 아랫단은 대리석으로 장식된 황제의 자리가 있었고,

그 뒤쪽으로 주요 인사들의 자리가 있었다. 

 

 

 

 

클라우디우스 통치시대에 시작되어

트라야누스 황제때 끝난 대대적인 보수공사로 인해

관중석은 그 원래의 형태에서 많이 바뀌었다고 한다.

계단의 좌석에 쓰였던 대리석들이

 후에 다른 건물을 짓는 자재로 사용되는 바람에 원형이

더욱 많이 훼손되었다.

 

 

 

 

대극장은 과학적인 설계로 아무 음향장치가 없어도

소리가 울려 퍼지는 구조로

 무대 위에서의 배우 음성이 관객이 있는 객석에까지

선명하게 들릴 수 있게 음향 전달을 위하여

 객석 아래에 청동관과 토관을 묻어 공명장치로 진동을 극대화 했다고 한다.

지형과 자연환경을 통해 놀라울 정도로 대단한 음향 기술을 구현한 것이다.

지금도 여름이면 이곳에서 공연과 축제행사등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지중해 세계를 매료시킨 아르테미스 여신 신앙은

 1세기 무렵까지 강하게 남아 있었는데

에페소에는 특히 은으로 아르테미스 여신 조각을 만드는

수공업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사도 바울이 기독교를 전파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우상 숭배를 금하자

 그들은 생계에 타격을 받게되었고

결국 데메테리우스라는 은세공업자와 그의 추종자들이

 사도바울과 제자를 공격하는 사건을 벌이게 되는데,

여기 대극장에서 에페소의 은세공장이들이 소란을 피웠던 것이다.

 성경의 사도행전 19장 23절~38절 기록의 바로 그 역사의 현장이 이 곳이다.

 

 

 

 

대극장을 나가는 문은 좁다.

 

 

 

 

항구 (아르카디아)거리

 

극장에서 항구가 있는 바다를 향해 곧장 뻗은 길이 항구거리인데

지금은 지붕은 사라지고 원주형 기둥만 남아 있다.

이 항구거리의 바다에 토사가 밀려와 쌓이면서

더이상 항구로서의 기능을 할 수 없게 되었고, 

항구가 사라지자  천년이 넘게 에게해 최대의 항구도시,

상업도시로 번영을 누렸던 에페소의 영화도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항구로 향하는 아르카디아(항구)거리

 

대극장에서 나오면 항구로 향하여 곧게 뻗어있는 아르카디아 거리가 있다.

배가 항구에 입항하면 상인과 선원들은 이 거리를 통하여 에페소로 들어왔다.

길이가 600m이고 넓이가 11m에 이르는 이 거리는

 아르카디우스 황제(AD395~408)에 의해 복구 작업을 거친 후

황제의 이름을 따서 재 명명되었다.

대극장과 주변지역을 항구까지 연결시키는 이 거리는 길 양쪽에 주랑이 있고,

바닥에는 모자이크가 만들어져 있었다.

일련의 상점들로 구성된 이 열주랑은 겨울이면 비바람으로부터

여름이면 뜨거운 태양으로부터 주민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네 개의 높은 기둥 상단에는 네 명의 사도 동상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에 로마, 안티오크와 함께 도시의 거리에

횃불로 된 가로등이 있었던 세 곳 중에 한 곳이며,

가로등을 설치하여 거리를 밝힐 정도로 밤 낮없이 활기가 넘치는 도시였다.

지금은 지형 변화로 인해 에게해에서 약 5Km  떨어진 내륙에 위치해 있지만

당시의 에페소는 아르카디안 거리 끝자리에

바닷물이 넘실대던 항구도시였다.

 

 

 

 

여기서 북쪽출구 쪽으로 나아가다

왼쪽으로 난 샛길로 가게 되면 성모마리아 교회가 있다고 하는데

 우리는 바로 북쪽 출구로 나갔기 때문에 볼 수 없었다.

 

 

 

 

 

성모 마리아교회는 AD 2세기에 세워졌으며,

AD 431년에 이 교회에서

 예수와 성모 마리아의 신성이 논의된 제 3차 종교회의가 열렸는데,

이 종교회의에서 예수가 신성과 인성을 모두 갖춘 존재이며,

 성모마리아는 신의 어머니라는 것을 선언하게 된다.

이로써 마리아가 단지 육체로서만

예수의 어머니라고 주장한 네스토리우스파를 정죄하였다고 한다.

이후 에페소는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기독교 중심지 중의 하나가 되었고,

에페소에서의 성모 마리아 숭배는 더욱 증가 되었다고 한다.

 

 

 

 

항구의 거리로 끝까지 나가지 않고

도중에 있는 북쪽 출구쪽으로 나갔다.

 

 

 

 

 

에페소는 소아시아의 에게해 연안에 위치한 고대도시로

BC 1400년 아마존족에 의해 처음 세워졌다고 알려져 있으며

BC 11세기경부터 그리스의 식민도시가 되어 초기 그리스 문화가 뿌리를 내렸고

BC 6세기경에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다가

BC 334년 알렉산더대왕이 점령하게 되면서 헬레니즘 문화가 융성하였으나,

마케도니아의 멸망 후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어 

지금도 남아있는 웅장한 건물들이 들어서게 된다.

이후 60여년이 지나 아우구스투스황제때부터 재건되기 시작하면서

다시 옛 명성을 되찿았는데, 당시 에페소는 인구 20만의 대도시로 성장하여

로마제국 아시아 속주의 수도로 부상하였으며,

지금 남아있는 대부분의 건물들은 이때 건설하였다.

 

 

 

 

 

에페소가 폐허가 된 것은

7세기 무렵 강에서 유입되는 토사가 바다를 메우면서

항구의 기능을 잃게 되었고, 말라리아 전염병이 창궐하였으며,

수 차례의 대지진으로 도시가 파괴되어 사람들이 떠나갔기 때문이다.

또한 12세기에 이슬람국가인 오스만제국이 지배하게 되자

많은 기독교인들이다른 지역으로 이주한 것도 한 원인이다.

 

 

 

  

이제 북쪽출구로 나간다.

 

 

 

 

에페소 도로 양쪽에는 무화과나무와 올리브 나무가 많았다.

 

 하루에 몇 알씩 먹으면 건강에 좋다고 하는

올리브 열매는

터키가 원산지로 BC 3000년부터 재배해 왔고

지중해 연안에 일찍 전파되었다.

주요 생산국은 이탈리아 ·에스파냐 ·그리스 ·프랑스 ·미국 등이다.

과육에서 짠 기름을 올리브유라고 하며 용도가 매우 많다.

그린 올리브는 덜 익었을 때, 블랙 올리브는 완전히 익었을 때 수확해서 절임을 해서 먹는다.

 완전히 익은 올리브에서는 오일을 여러 번 짠다.

저온에서 가장 먼저 짠 것이 질이 제일 좋고 노화방지제의 함유량도 높다.
구약성서의 창세기에는

 “비둘기가 저녁 때가 되어 돌아왔는데 부리에 금방 딴 올리브 이파리를 물고 있었다.

 그제야 노아는 물이 줄었다는 것을 알았다”(8:11)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바탕이 되어 올리브 잎이 평화와 안전의 상징으로 되어 있다.

 

 

 

 

현존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도시 유적지인

에페소를 떠나 약 2시간 40분만에 파묵칼레의 하리시호텔에

도착했다.

 

 

 

 

호텔 프론트

 

 

 

 

호텔 로비

 

 

 

 

객실이 여러 동으로 되어 있어

찿기가 약간 힘들었다.

 

 

 

 

객실

 

 

 

 

목욕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