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터키 트로이 ] 트로이

푸른 바다. 2015. 6. 23. 00:55

트로이

 

 

 

 

 

 

그리스, 터키 여행 네째날 2015년 3월 29일 일요일

 

 

차나칼레 이리스호텔 옆의 해변에서

동지중해(에게해)의 바다를 가슴 가득 느끼고

이제 고대 신화 속의 땅이 현실로 나타난 트로이로 향했다.

책을 가장 왕성하게 읽던 여중 시절에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오딧세이를 읽고 오딧세우스의 모험을

 열심히 탐독했던 생각이 난다.

그리고 영화 율리시즈(오딧세우스)에서 율리시즈~~~라고 외치던 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역사 유적 1001에 올려져 있는

트로이를 내 눈으로 확인 할 시간이 다가왔다.

 

 

 

 

지금 이 사진을 찍은 시간이 오전 6시 38분이다.

페키지로 여행오면 항상 새벽에 일어나서

밥 먹고 짐 싸서 움직여야 한다.

그래야 스케쥴을 제대로 소화해 낼 수 있다.

 

 

 

 

차나칼레에서 트로이로 가는 길인데

터키에서는 어디서던 보이는

 미나렛( 이슬람 사원의 첨탑)이 보인다.

 

 

 

 

인터넷에서 퍼 온

차나칼레 항구 앞 공원에 만들어 놓은 트로이 목마 모형

 

 

 

 

입장권

 

터키의 주요 유적지들의 입장권은 

뒷 배경 그림과 앞 무늬 색깔이 다를 뿐

디자인은 비슷한 것 같다.

 

 

 

 

트로이 유적지로 들어가는 문

입장권을 기계에 통과 시켜야 한다.

 

 

 

 

트로이

 

트로이는 서쪽으로는 에게 해를 두고 그리스와 마주하고 있고,

 남쪽으로는 북아프리카의 이집트로 내려가는 해로가 있고

 동쪽으로는 아나톨리아 너머 메소포타미아 지역까지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도시와 문명이 발달했다.

 트로이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초기 청동기 시대인 기원전 4천년부터였다.

기원전 3천년을 기점으로는 방어벽과 성채가 세워졌고,

기원전 2천년부터는 돌로 된 건물이 일반화되고

문화가 번성하면서 차츰 도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이후 기원전 1350년경의 지진으로 한차례 파괴되었다 재건되었는데,

 호메로스일리아스에서 묘사한 트로이 전쟁과 화재는

기원전 13세기나 12세기경에 일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한동안 버려졌던 도시는 기원전 8세기

 그리스 이주민들이 들어오면서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으며,

기원전 2세기에는 로마의 모도시로 추대돼 경제적 혜택을 누리기도 했다.

 

 

 

 

왼쪽 길은 유적지로 가는 길이고

오른쪽 길은 화장실과 트로이의 목마가 있는 곳이다.

 

 

 

 

안내판

 

헬레니즘시대 및 로마시대때

 트로이일리움이라고 불리었다.

 이 시대에 알렉산더 대왕

아시아 원정 도중에 일부러 이곳을 들렀다.

 

 

 

 

이 목마는 초등학생이 그린 그림을 토대로 만들었다고 한다.

브래드 피트 주연의 트로이에 나오는 목마는

차나칼레시에 있는 목마 모형인 것 같다.

 

 

 

 

우선 유적지부터 갔다가

 뒤에 목마를 보는걸로 하고

 

 

 

 

한 길로 가면 다른 길로 나오게 되어 있다.

 

 

 

 

트로이 유적지는

1996년 터키 역사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199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트로이 전쟁에 얽힌 이야기는

 고대인들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수많은 영웅 서사시가 만들어졌으나

그 중에서 뛰어난 문학성을 인정받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만이 후세에 전해졌으며,

 이 전쟁과 관련된 이야기를 소재로 하여 수많은 예술 작품이 탄생하였다.

한편 고대에는 이 전쟁의 역사적 사실성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았으나,

19세기의 비판적 역사 연구에서는 허구적인 신화로 취급하는 풍조가 강하였다.

그러나 하인리히 슐리만이 1870년부터 트로이 유적지를 발굴함으로써

 두 나라 사이에 충돌이 있었다는 역사적인 근거를 얻게 되었다.

 1930년대에 미국의 블레겐이 트로이 유적에 대한 과학적인 재조사를 시행한 결과,

트로이전쟁이 사실성을 갖는다면

 9층으로 이루어진 유적 가운데 BC 1250년의 것으로 추정되는

제7층 A가 여기에 해당한다고 주장하였다.

 

 

 

 

 

호메로스는 B.C. 9세기경에 활약했던 그리스의 시인으로

대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의 저자로 추정된다.

 그리스인들이 이 두 편의 서사시에 호메로스라는 이름을 결부시켰다는 사실 외에

그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일리아스는

호메로스가 지은 장편 서사시로 그리스 최고,최대의 작품이다.

 이 시는 첫부분에 선언되어 있듯이,

 그리스 군대의 총사령관 아가멤논에게 모욕을 당한

가장 위대한 전사 아킬레우스의 분노에 대한 이야기이다.

10년간 계속된 트로이 전쟁 전반을 농축적으로 보여줄 뿐만 아니라,

 온갖 형태의 모순, 무모하고 탐욕스러운 자만심 등

인간적인 면모를 지닌 영웅의 전형을 그린 작품이다.

 

오디세이아 역시 호메로스가 지은 장편 서사시로

트로이에서 승리를 거두고 그리스로 돌아가는 영웅 오디세우스가

수많은 모험 끝에 고향에서 기다리는 아내와 재회한다는 이야기다.

 

 

 

 

 

트로이 성 모형

 

 

 

 

트로이 동문쪽 성벽

 

트로이의 현재 지명은

히사를륵으로 성이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트로이는 아나톨리아 지방 북서부, 

트로아스 지방의 에게해 연안에서 5㎞ 떨어진 히살리크 언덕에 있다.

독일의 고고학자 슐리만이 이 지역을

 호메로스가 일리아스에서 노래한 트로이라고 여기고

1870년부터 발굴을 개시하여

이 곳이 역사적으로 실재했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트로이 동문쪽 성벽

 

트로이 6기에 만들어진 도시 성벽이다.

 트로이 유적은 기원전 3000년 청동기 시대부터 로마시대까지 9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트로이 6기는 기원전 1800년부터 1275년까지로 추정된다.

 

 

 

 

가이드가 성벽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다.

 

제 6 트로이의 성벽을 끼고 언덕 아래로 내려가면

S자로 굽어진 성벽과 성벽 사이의좁은 통로를 지나는데

성의 동쪽 문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동쪽 성문은 성벽이 겹치는 곳에 자리잡고 있어 동쪽 성문으로 갈려면

양쪽에 성벽이 있는 2m 폭의 좁은 통로를 지나야 한다.

통로 끝은 크게 휘어져 있다.

적군이 성문을 부술 공간을 주지 않기 위한 시설이다.

또 성문 양 옆에는 공격용 탑이 있어 적을 협공할 수 있고

두 성벽이 만나는 곳에는 나무로 만든 육중한 성문이 있었다고 한다.

 

 

 

 

 

트로이 전쟁의 전설

 

지금으로부터 3000년도 더 전에

바다의 여신 테티스와 펠레우스의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한

불화의 여신 에리스가 남긴 황금 사과를 두고

 헤라와 아프로디테(로마신화의 비너스),아테나가 서로 다투다가

황금사과를 던져서 그것을 주운 사람에게 심판을 받자고 했다.

이 황금사과를 주운 트로이 왕자 파리스가 심판을 내리게 되었는데

이때 헤라는 이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아테네는 모든 전쟁에서 승리를,

아프로디테는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여기서 파리스는 아프로디테를 선택했고,

그 결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게 해 주겠다고

약속한 아프로디테는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의 사랑을 얻게 해 주었다.

아내를 빼앗긴 메넬라오스는 미케네의 왕인 형 아가멤논과 용맹한 아킬레우스,

 전략가 오디세우스, 역전의 용사 네스토르 등의 그리스 영웅들을 이끌고 트로이 공략에 나섰다.

그러나 트로이의 성벽은 견고했고, 그리스군의 아킬레우스와 오디세우스,

 트로이군의 헥토르와 아이네아스 등 숱한 영웅들과 올림프스의 신들이 얽혀

10년 동안이나  전쟁이 계속되었지만 트로이는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오디세우스는 역사에 길이 빛날 계책을 세웠는데, 거대한 목마를 남겨 놓고 철수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 목마는 뛰어난 목수이자 권투 선수이던 에페이오스가 만들었고,

철수하는 듯하던 그리스인들은 근처 테네도스 섬에 머무르고 있었다.

한편 뒤에 남은 시논은 트로이인들에게 난공불락의 성을 만들어 준 아테나 여신에게 제물로 바치기 위해

 목마를 만들었다는 말로 트로이인들을 현혹시켰다.

이에 트로이인들은 기쁨의 환호성을 울렸다. 라오콘과 카산드라가 경고를 했는데도

 트로이인들은 여신에게 바쳐진 제물인 목마를 성 안으로 끌어들였고,

밤새도록 술에 취해 승리를 즐겼다.

이튿날 새벽 목마 안에서는 오디세우스를 비롯한 그리스 병사들이 빠져 나와 성문을 열었고,

 그 틈으로 그리스 병사들이 들어와 트로이 성을 함락시켰다.

 이때부터 ‘트로이의 목마’는 외부에서 침입한 요인에 의해 내부가 침략당하는 경우를 가리킬 때 쓰는 용어가 되었다.

 한편 메넬라오스는 목마 속에 숨어들어가 파리스가 죽고 재혼한

 헬레네의 새 남편 데이포보스를 살해했는데, 그는 파리스의 아우였다.

 이때 헬레네는 메넬라오스를 은밀히 안내하여 협력했다고 한다.

 트로이 성이 함락된 후 헬레네와 화해한 그는 이집트 등을 떠돈 끝에

8년 후 고향으로 돌아와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호메로스의 대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에 등장하는 트로이 전쟁은

실제 유적이 발굴되기 전까지만 해도 신화 속의 이야기라고만 생각되었다.

하지만 독일인 하인리히 슐리만은

  이 이야기가 무언가 사실에 기초한 것이라고 생각했고,

어릴때부터 트로이를 찿겠다는 꿈을 가졌다.

이후 1870년 4월, 이 지역에서 처음 발굴을 시작한 슐리만은

1873년 6월 드디어 트로이의 유적을 발견했다.

고고학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굴을 하였고

후에 미케네도 발견함으로써 고고학 역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그러나 슐리만은 트로이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아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고,

그 일로 지금까지도 엄청난 비난을 받고 있는데

그는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등장하는 시대만을 염두에 두고 발굴했기 때문에

 B.C. 2000년 이후의 유적을 파괴하고 말았다.

 이후 슐리만은 자신의 잘못에 대해 깊이 뉘우쳤지만

그리스 이후의 유적은 영원히 잃어버리게 되었다.

 

 

 

 

회랑이 있는 건물 터

 

성 안으로 들어가서 몇 계단을 올라가면 왼쪽에

6 트로이 시대의회랑이 있는 건물 터가 나온다.

일반인들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 곳으로 이 건물 터 안쪽에

6 트로이의 신전으로 추정되는 건물 터가 있다.

 

 

 

 

 

1870년 4월, 이 지역에서 처음 발굴을 시작한 슐리만은

1873년 6월 드디어 트로이의 유적을 발견했다.
 황금잔과 왕관, 목걸이 등의 유물이 발견됨으로써 이 도시가

전설 속의 트로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는 이 유물들을 일리아스 속에 등장하는 트로이 왕의 이름을 붙여

 프리아모스의 보물이라고 불렀다.

 

 

 

 

 

저 멀리 마을에 이슬람 사원과 미나렛이 보인다.

 

 

 

 

트로이 평원

 

오래 전에는 저 평야가 모두 바다였다고 하는데

지금은 바다가 많이 물러 앉았다.

 

 

 

 

 

아테나여신 신전 복원도

 

 

 

 

아테나여신 신전터

 

 

 

 

아테나여신 신전의 파편 문양

 

 

 

 

 

 

트로이 유적지는

9개의 다른 시대 도시들이 겹겹이 쌓인 형태로 발견되었고

9층에 걸친 고대도시 유적지가

 쌓이고 보존된 곳은 전세계적으로 유일하다고 한다.

 

 

 

  

 

9충으로 이루어진 유적지 2층의

 왕궁으로 짐작되는 건물에서 많은 금, 은 제품이 발견되었다.

 

 

 

 

출토된 제품들

 

 

 

 

 

 인공 구조물 서쪽 가장자리에는

 항아리와 금으로 만든 보물이 발견된 터가 있다.

 

슐리만은 이때 발굴한 유물들을 독일로 밀반출하여

1881년 베를린박물관에서

 처음으로 공개함으로써 찬란했던 트로이문화가 세상에 알려졌다.

1945년 베를린을 점령한 소련은 이를 탈취, 전쟁 중에 소실 되었다고 알려졌으나

 금·은 보물은 모스크바 푸시킨미술관에,

 도자기류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슈미술관에 소장하다가

1996년 4월 푸시킨박물관에서

60여년만에 일반인에게 250여점의 트로이 보물을 공개했다.

독일 정부는 러시아로부터 이 보물들을 돌려 받으려 했으나

러시아는 독일이 저지른 침략전쟁의 배상금으로 간주한다면서 돌려주지 않았다.

 

 

 

 

제 1 트로이 성벽

 

커다란 천막 형태의 공간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처음 요새가 형성되었을 때 만든 벽과 바닥부터

최고 수준의 문화를 자랑했던 7a와 7b 시대 때 조성된 벽과 유적지를 볼 수 있어

트로이가 여러 차례에 걸쳐 형성된 도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천막안에 있는 제 1 트로이의 성문 터는

 돌로 기초를 튼튼히 다지고

그 위에 흙벽돌을 쌓았다.

5,000년 전 청동기 시대의 회백색 옛 흙벽돌 위에

새로 쌓은 붉은 빛깔의 흙벽돌이 선명하게 드러나 보인다.

 

 

 

 

 

트로이는

유물이나 유적이 온전히 보존된 곳이 아니라

단순히 '터'를 볼 수 있는 곳으로

고고학자 슐리만 하인리히가 1870년 처음 이 곳을 발굴한 이래

15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발굴 작업이 한창이다.

 

 

 

 

제 2 트로이 왕궁 성벽 복원도와 왕궁 성벽에 새겨진 인물 조각

 

 

 

 

제 2 트로이 왕궁 성벽

 

 

 

 

왕궁 유적

 

제 2 트로이는 BC 2,300~2050년 사이에

이전의 주거지와 같은 곳에 성립했던 도시이다.

제 1트로이에 비해 성벽이 확장 된 것으로 보아

인구가 증가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거지와 궁전 지역이 격자형으로 되어 있어 계획적으로

설계된 도시임을 알 수 있다.

왕의 집으로 불리는 메가론과 그 주변에서

프리아모스의 보물이라고 불리는 장신구들과 수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트로이 시기별 유적층

 

 트로이 유적지는 기원전 3000년전

 청동기시대부터 로마시대까지의 유적 층이 겹겹이 쌓여 있다.

시기별로 9층으로 표시해 놓았다.

 

 

 

 

트로이는 트로스의 도시라는 뜻이다.

 유적은 9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최하층은 BC 4000년 말기의 것으로, 성벽으로 에워싸여 있었다.

제2층에는 메가론식의 왕궁으로 짐작되는 건물이 있고,

이 층에서 많은 금·은 제품을 발견하였으며, 이 층을 호메로스 시대의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후 슐리만을 도운 독일의 고고학자 되르프펠트는

아래에서 제6층에 해당하는 곳이 호메로스 시대의 것이라고 하였다(BC 15∼BC 12).

그러나 1932년부터 미국의 블레겐이 다시 조직적으로 발굴하여

한 층 위인 제7층 A를 호메로스 시대의 것이라고 수정하였다.

제7층 B는 철기시대 초기, 제8층은 그리스인이 이민한 아르카이크시대의 것이며,

 맨 위층인 제9층은 헬레니즘시대 및 로마시대의 유적으로

이 무렵 도시는 일리움이라고 불리었다.

이 시대에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원정 도중에 일부러 이곳을 들렀다.

그리고 당시 트로이는 미케네 문화권에 속했으며,

주변 해협을 지배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여서

 무역으로 번영을 누렸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트로이 유적은 그 연대에 따라 크게 아홉 층으로 구분할 수 있다.

칼버트의 연구와 슐리만의 노력으로 발견된 트로이는 대단히 복잡한 유적이었다.

  트로이는 도시 위에 도시가 건설되어 있는 복합 유적이다.

 

 

제1층

B.C. 3300 ~ B.C. 2500년

제2층

B.C. 2500 ~ B.C. 2200년

제3층 ~ 5층

B.C. 2200 ~ B.C. 1800년

제6층

B.C. 1800 ~ B.C. 1275년

제7층

B.C. 1275 ~ B.C. 1100년

제8층

알렉산드로스 대왕시대

제9층

로마시대

 

 

 

 

 

슐리만 이후

 트로이에 대한 발굴과 연구는 그의 동료인 빌헤름 되르펠트가 계승했다.

그는 슐리만과 함께 트로이를 발굴했으며,

 각층의 연대를 체계적으로 구분한 인물이었다.

그후에도 수많은 고고학자들이 트로이 발굴에 참여했으며,

 지금도 계속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한 시대 도시유적 위에

다음 시대 도시유적이 잇달아 쌓여 있는 모양새로,

 일반적으로 9개의 구역으로 나뉜다.

 언덕 중심부의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트로이 1구역(3000~2600 BC)은

유적지 내 최초의 거주 흔적이라 볼 수 있는데,

햇빛에 건조시킨 흙벽돌로 쌓은 방어벽이 남아있다.

그 위를 에워싸듯 포개져 있는 2구역(2600~2250 BC)에서는

 돌과 흙벽돌을 함께 사용한 성채와 성벽,

 청동기 시대의 거주지 흔적인 메가론(megaron)이 발견되었다.

 슐리만이 발굴해 독일로 유출한,

 ‘프리아모스 왕의 보물’이라 불리던 다수의 금재 장신구와 보석도 여기서 출토된 것이다.

 3구역(2250~2100 BC), 4구역(2100~1900 BC), 5구역(1900~1800 BC)에서는

 이전 시대보다 발달된 기술이 적용된 규모가 큰 석재 건축물들의 흔적을 볼 수 있다.

 6구역(1800~1300 BC)은 기원전 1350년의 지진으로 파괴된 것으로 보이는

 에게 해의 대규모 도시 문명이다.

화재와 재건의 흔적이 보이는 7구역(1300~1000 BC)은

외부 침입으로 인한 큰 전쟁이나 지진이 있었던 시대로 추정된다.

 슐리만은 발굴 당시 2구역을 호메로스가 이야기한 트로이라고 주장했으나

 오늘날의 학자들은 이 7구역을 트로이 전쟁이 있었던 시대라고 생각한다.

 기원전 800년경 조성된 8구역은

이주민들이 들여온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도시문명이다.

9구역은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6세기까지의 유적으로 로마제국의 점령과 관련이 있다.

 이 로마시대 구역 남쪽 가장자리에는 말발굽 형태의 건축물들인 극장 오데이온

 회의장 불레우테리온, 직사각형의 테두리를 가진 로마식 공중목욕탕 등이 남아있다.

 

 

 

 

 

우물터

 

 

 

 

 

 

트로이 경사로

 

 트로이 2기의 유적으로 대리석으로 포장되어 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보면 제우스는

늘 아테나가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모습을 보인다.

트로이 전쟁에서 트로이 편을 들었던 아레스는

아테나의 공격을 받고 상처를 입자 제우스에게 아테나를 너무 귀여워하니까

 다른 신들에게 함부로 한다고 불평을 터트린다.

이처럼 제우스는 낮은 곳에서 위엄을 지키며

멀리 아테나 여신이 강력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제우스가 특별히 아테나를 사랑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보면 아테나는 아버지 제우스에 순종하지만

도리어 제우스가 아테나의 눈치를 보는 상황도 나타난다.

제우스는 항상 아테나의 마음을 먼저 알고 아테나가 원하는 대로 하도록 허락한다.

가령 제우스가 아킬레우스에게 쫓겨

트로이 성벽을 세 바퀴나 도는 헥토르를 보고 불쌍히 여겨

그를 죽음에서 구할까 말까 고민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아테나가 어차피 죽을 운명을 가진 인간을

다시 구하려는 것에 비난을 퍼붓자

제우스는 얼른 아테나에게 상냥하게 대하며 마음대로 하라고 말한다.

안심해라, 트리토게네이아여, 내 딸이여, 내 진심에서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며,

너에게는 상냥하게 대해주고 싶구나.

 그러니 네가 좋을 대로 하고 더 이상 주저하지 말아라.
『일리아스』 (22.183-185).

 

 

 

아킬레우스

 

트로이 전쟁때 아가멤논의 군대에서

가장 잘 생기고 가장 용감하며 뛰어난 전사인 아킬레우스는

 바다의 님프 테티스 여신과 미르미돈족의 왕인 펠레우스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아킬레스건은 트로이 전쟁에서 나오는 아킬레우스의 약점을 뜻한다.

그의 어머니 테티스는 아킬레우스를 불사의 몸으로 만들기 위해

저승에 있는 스틱스 강물에 그를 넣었다가 뺏는데

테티스가 잡고 있던 발 부분이 물에 잠기지 않아서 발뒤꿈치가 유일한 그의 약점이 되었다.

헥토르를 전사시키고 뒤에 자신도 아폴론 신에게 화살을 얻은 

 팔라스의 화살에 발 뒤꿈치를 맞고 전사했다.

 

 

 

 

제단 터

 

제단이 있는 이 곳은 일리온으로

 불리던 기원 전 7세기에 세워진 유적이다.

어느 신을 모시던 제단인지는 알 수 없다.

 

 

 

 

여러 개의 우물과 제단이 남아 있는 서남쪽 유적지

 

 

 

 

 

 

 

 

 

 

트로이 오데온 

 

트로이 9기에 만들어진 로마 극장이다.

 트로이 유적은 기원전 3000년 청동기 시대부터 로마시대까지 9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지막 9기는 로마시대였던 서기 500년까지로 추정된다.

 

 

 

 

트로이 오데온

 

제 9 트로이의 오데온은 BC 85~400년  만들어진

 로마 시대의 원형극장으로 오데온의 규모로 짐작해 보아

 당시 트로이는 상당히 작은 규모의 도시였음을 알 수가 있다.

 

 

 

 

 

 

트로이왕국의 음악당인 오데온 유적지

 

이 곳에서 로마시대에 모임, 시 낭송, 음악 연주 등이 이루어졌다.

 

 

 

 

이 오데온을 짓기 위해

남쪽 문과 서쪽 문 사이에 있던 121m의 길이의 성벽이

상당 부분 파손되었다.

 

 

 

 

 

 

 

 

 

"트로이는 세계 3대 허무 유적지다." 라는 말이 있는데

유명세에 비해 특별하게 볼 것이 없다는 말이다.

사실 유적 전체가 아직 발굴중이라

뚜렷하게 인상적인 화려하고 웅장한 건축물이 없는 것은 사실이다.

 

 

 

 

 

유적지를 둘러보고 난 뒤

가이드가 30분의 자유 시간을 주길래

자유로이 유적지에서 나와 목마를 보러 갔다.

 비록 모형이지만

아킬레우스, 헥토르, 오디세우스 같은 영웅들이 벌이는

소설 속 장면들이 생각나게 한다. 

 

 

 

 

 

"승리감에 도취해 있던 트로이는 목마를 성 안으로 들여오고,

목마 안에 숨어 있던 병사들이 열어준 성문으로

그리스 군대가 밀려들어오면서 트로이는 초토화되고 만다."

-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중에서 -

 

 

 

 

 

 트로이 주변에서 발굴된

 동전과 도자기를 근거로 트로이 목마 모형을 만들었다고 한다.

 1996년 터키 역사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고,

 1998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

 

 

 

 

 

트로이 목마 모형은

 나무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각도에 따라서

 모습이 달라보이며 다양한 연출을 한다.

 

 

 

 

 

영화 트로이 중에서

 

 

 

 

트로이 목마 내부로 올라가 봤다.

 

 

 

 

내부로 올라가는 계단

 

 

 

 

트로이 목마 내부

 

 

 

 

트로이 목마 내부

 

 

 

 

목마 안에 난 창으로 밖을 내다 보았다.

 

 

 

 

오를 때는 잘 몰랐는데

내려갈 때 보니 계단이 가파르다.

 

 

 

 

옛 복장인 사진 모델

 

 

 

 

돈을 주고 찍어야 한다.

 

 

 

 

마그네틱을 사기 위해 기념품 집으로

 

 

 

 

 

 

 

 

 

 

 

[참고 출처: 두산 백과,네이버 지식백과, 세계 지명 유래 사전, 그리스 로마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