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터키 이스탄불] 성 소피아 박물관, 아야소피아, 하기아소피아

푸른 바다. 2015. 8. 25. 09:12

 성 소피아성당

 

 

하기아소피아 (비잔틴 이름), 아야소피아 (터키 이름)

 

 

그리스, 터키 여행 8일째 2015년 4월2일 목요일

 

 

오늘 이번 여행의 마지막 날 아침

블루모스크를 시작으로 히포드롬을 보고나서

아야 소피아 박물관으로 가고있다.

아야소피아를 보지 않고는

이스탄불을 다녀왔다고 말할 수 없다고 한다.

그 만큼 아야소피아가 차지하는 위상이 남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로마 제국의 중흥을 이끌었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오 솔로몬이여! 나, 그대에게 이겼노라라는 말을 했다는

그 위대한 아야소피아를 나역시 보고나면

속으로 외치리라.

아야소피아를 보았노라고.

 

 

 

 

 

이스탄불 주요 명소

 

 

 

 

하기아소피아 조감도

 

 

 

 

아야소피아 박물관 티켓

 

세계 8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일컫는

성소피아성당의 현재 정식 명칭은 아야소피아 박물관이다.

1923년 터키공화국이 수립되었을 때

유럽 각국은 하기아 소피아의 반환과 종교적 복원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터키의 초대 대통령 케말 파샤 아타튀르크는

 1934년 10월 이곳을 비잔틴문명과 이슬람문명의 공존을 위해

일체의 종교행위를 금지하고 국립박물관으로 지정했다.

 

 

 

 

히포드롬에서 성 소피아 박물관으로 가고 있다.

 

 

 

 

최초의 아야소피아는

비잔틴제국의 수도로서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불렸던

 서기 360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작은 규모로 지어졌으나,

404년 알카디우스 황제 때 주교가 추방된 것에 반발하여

 일어난 폭동으로 발생한 화재로 소실된 것을

11년 뒤인 415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복원했지만,

 532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총애한

이집트 무희 출신의 왕비 데오도라 때문에 일어난 니카의 반란때

 히포드롬에서 농성하는 반란군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성소피아성당이 또 다시 파괴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그 잔해 위에

황제의 권위와 교회의 영광에 걸맞는 새로운 성당을 세우기로 결정하고

건축가 안테미우스와 수학자 이시도르를 투입,

 5년만인 537년에 이 거대한 성당 축조를 완료했다.

 

 

 

 

동서양 문명의 공존이라는

 이스탄불의 특성을 상징하는 건물인 성소피아 성당은

동로마제국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5년 10개월 동안 장인 100명과 노동자 1만여명을 동원해

537년에 드디어 성당을 완공했다.

 교회 내의 기둥은 로마제국 곳곳에서 가지고 온 것으로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과

레바논 바르베크의 아폴론 신전에서 운반해 온 기둥 등 

세계 곳곳에서 가져온 석재들을 이용해 건설되었다.

멀리 이집트에서 온 것도 있다.

 

 

 

 

원래 이름이 하기아소피아 즉

성스러운 지혜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성 소피아는

 762년까지는 성당으로 역활을 충분히 수행하게 되지만

그후 서로마제국과 가톨릭이 분리되면서

아야소피아는 그리스 정교회의 총본산으로 바뀌게 되어

   그 명칭도 그리스어인 '하기아 소피아'로 불리게 된다.

하지만 1453년 다시 이곳이 오스만 제국에 의해 점령되어

이슬람 모스크로 바뀌게 되면서

터키 발음에 맞게 아야소피아라 불리게 되고

이슬람의 상징인 4개의 미나렛(첨탑)이 세워지게 된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이기도 한

 성 소피아 성당은

 역사상 매우 의미있는 교회 건물 중 하나로

세계의 교회 중 5번째로 크며,

기독교가 부흥되었던 비잔틴 시대에는

동 로마제국시대 그리스 정교의 본산지로

 국가의 중심교회로 916년 이상 사용되었고,

비잔틴이 무너지고 오스만 제국이 점령한 뒤에는

400년 이상을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되었다.

지금은 한 건물에 그리스 정교와 이슬람교 이들 두 종교가

공존하는 박물관으로 남아 있다.

 

 

 

 

 미나레 4개는 메흐메드 2세가

하기아 소피아를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하기 위해

1450년 이후에 세운 것이다. 

 

 

 

 

아야소피아는 비잔틴제국의 카톨릭 성당으로

1500여년이 경과되었음에도 그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세계 건축학상 8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불가사의하다는 말에 포함되는 또 다른 하나의 의미는

 불과 5년10개월의 짧은 시간 동안에 건축되어

그때 이후 현재의 성당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탄불의 상징인 성소피아 성당은

비잔틴시대에는 그리스정교의 본산으로

황제 대관식 등 중요한 행사 장소로 쓰였다.

 오스만투르크 제국 시절에 이슬람 사원으로 변모했으나

 이슬람교도들은 성당의 원래 구조를 바꾸거나 파손하지 않았고

 회칠로 벽화를 가리거나 일부 건축 요소만을 추가했기 때문에,

 현재 복원을 통해 비잔틴 시대의 벽화와

모자이크 등을 감상할 수 있다.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 메흐메드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뒤

소피아 성당을 찾은 그는 성당의 위대함에 놀라

무릎걸음으로 제단에 이르렀다고 한다.

모자이크를 파내지 않고 성화 위에 석회벽을 칠하고

그 위에 이슬람 문양을 그려 넣었지만 성당 파괴 행위는 없었다.

 1934년 케말 아타튀르크 (터키 초대 대통령)에 의해

박물관으로 바뀌고 나서, 벽의 회칠을 벗겨내자

수많은 성화가 훼손되지 않은 채 드러났던 것은

그러한 연유에서다. 

 

 

 

 

성소피아성당의 우수한 점은

 수차례의 대지진 때도 쉽게 무너지지 않은

우수한 내진구조라 할 수 있다.

지난 99년 터키 대지진 때도 주변의 건물들이

무너져도 성소피아 성당만은 안전했기에

"지진이 나면 무조건 아야 소피아 속으로 도망가라"는

 말이 생겼다 한다.

 

 

 

 

 

 

1500여 년 전 건축되어

비잔틴 건축의 으뜸으로 꼽히는

성 소피아 성당은

비잔틴 제국의 멸망 이후

 이슬람 건축물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아야소피아의 면적은 총 7,570평방미터이다.

 돔으로 만들어진 건축물의 백미로 여겨지는데

 15층 건물 높이에 해당하는 56m 높이로

 거대한 중앙 돔과 많은 보조 돔을 갖고 있으며,

 거대한 중앙 돔은 다시 4개의 소형 돔으로 연결되어 짐으로써,

건물 전체는 피라미드 모양으로 큰 돔을 중심으로

주변 부속 건물들이 사원을 떠받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

 비잔틴 건축물의 표본으로 꼽혀지고 있다.

 

 

 

 

오늘날 하기아소피아는

같은 부지에 지어진 세번째 건물이다.

그 첫번째는 서기 360년에 지어진 정방형 평면 내부에

 두 줄 혹은 네 줄의 기둥들을 세워 공간을 나누는 

고전 바실리카 양식으로 건축이 된 나무지붕으로 된 바실리카였는데

404년 발생한 폭동으로 불에 타버렸다.​

테오도시우스 2세가 415년에 교회를 다시 지었지만

 그것도 니카의 반란 때 소실되었다.

두번 째 바실리카가 불타 버린 후 40일째 되던 날,

유스티니아누스는 하기아 소피아를 재건축하기 시작했다. 

그는 537년 교회를 다시 열고 

하기아 소피아에 들어가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솔로몬이여, 나 그대에게 이겼노라!

 

 

 

 

하기아 소피아는 지은지 1,000년 동안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이었고 지금은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

스페인의 세비야 대성당,밀라노의 두오모 성당에 이어

5번째로 큰 성당이라 한다.

 

 

 

 

들어가기 위해 줄 서서 기다리고 있다.

 

 

 

 

샤르드반

 

하기아소피아 정원에

1704년 술탄 마흐멧 1세가 세운 수돗가로,

  보통 모스크 입구에 있어

   무슬림들이 기도 전에 귀와 손과 발을 씻는 곳이다.

 

 

 

  

지금은 종교적 행위가 금지된 박물관이라

수도꼭지들이 없다.

 

 

 

 

수돗문양이 정말 화려하다.

 

 

 

 

 

 

기둥에 십자가 표시가 명확하다.

 

 

 

 

 

사원의 내부에는 비잔틴 문화를 상징하는

 다수의 모자이크 벽화가 남아 있는데

그리스도를 품에 안은 성모 마리아의 모자이크는 특히 유명하다.

 비잔틴 시대의 모자이크 벽화는 콘스탄티노플이 1453년

오스만터키에 의해 함락되면서 회교사원으로 바꾸어진후

 벽화들과 모자이크들은 모두 회색 회칠로 가려지게 되었다.

 여기에 첨탑과 미흐랍(메카의 방향을 가르켜 주는 이슬람 제단)

그리고 민바르(이슬람 설교단)가 더해져 이슬람교 사원으로 변모한 것이다.

 1931년 미국 고고학 조사단에 의해 숨겨진 벽 안의 모자이크화가 발견된 후

 성 소피아 사원은 비잔틴 시대의 최대 유적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아야소피아 안내판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이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국세를 올리는 것 등에 반발하여

 니카의 선동으로 반란을 일으켰는데,

 성난 그들이 왕의 심기를 건드릴수 있는 방법은

 왕의 권위를 가장 잘 대변하는 성당을 태우는 일이었다.

 이미 한번 화재로 소실된 성당을 태우자 노한 유스티니아누스는 

히포드롬 광장에 모든 시민을 모아놓고, 군대를 풀어 살육하고는

1/3 정도가 남았을때 살육을 멈추도록 명령하였다.

 그리고 남은 1만명에게 너희가 불 태운 성당을 다시 재건하라.

 세상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성당으로 재건하라.

 만약 정해진 기간내에 성당을 완성하지 못한다면

 다시 너희들이 사라질 것이라고 명했다 한다.

금 600톤과 더불어 이 불가능한 미션을 받은 시민들은

하루 5시간 자지 않는다는 서로간의 규율까지 만들어가며,

6세기경 그들 손으로 5년 반만에 황제에게 아야소피아 성당을 완성하여 바친다.

 이 봉헌식에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황금빛 돔을 바라보며

나의 작품을 심판하실 신에게 영광을!

오! 솔로몬이여! 나 그대를 이겼노라. 라고 외쳤다고 한다.

이스라엘 임금 솔로몬이 기원 전 1,000년에 지은 예루살렘 성전보다

이 성당이 훨씬 훌륭하다는 것이다.

아야소피아 성당은 추후 르네상스시기의 피렌체 두오모성당이

 올라가기 전까지 최고의 돔성당으로 자리매김한다.

 

 

 

 

아야소피아 정문

 

 

 

 

 입구쪽 통로 벽돌

 

여기 회벽으로 칠해진 벽돌 부분은

 석회, 강모래 그리고 화산재로 만들어졌는데,

가벼운 소재를 이용하여

최대한 하중을 안 받도록 설계한 점이 과학적이라 한다.

 터키는 지각판이 만나는 지대여서 지진대에 속해

크고 작은 지진으로 인해 돔에 균열이 수차례 갔지만

완전히 허물어진 적은 없다고 한다.

당시로는 획기적인 내진설계로서 염분이 없는 강모래와

 석회를 섞은 회반죽사이에는 규산칼슘이 생겨나서

 균열이 발생시 자동으로 그 균열이 메꿔지는 형태라고

 가이드가 설명하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황제의 문

 

 들어가면 바로 중앙에

웅장한 규모의 황제의 문이 눈에 들어온다.

 

 

 

 

 

여러개의 문들 중 제일 크고 중앙에 있는 문은

황제와 총대주교만 이용했던 문이고,

황제의 문 양 옆에 있는 작은 문은 사제나 귀족들의 문이고

또 그 양쪽에는 평민들이 드나드는  더 작은 문이 있다.

 

 

 

 

금칠을 한 천장

 

이 건물에 들어간 천장의 황금색 벽화는

 황금을 그냥 칠해 놓은 것이 아니라

황금조각을 모자이크로 일일이 손으로 붙인 것이다.

그 당시 이 공사로 인해 엄청난 시민들이 죽고,

 눈이 멀거나 불구가 되었다고 한다.  

 

 

 

 

황제의 문 위 판토크라토르 (전능하신 주)

 

성당으로 들어가는 황제의 문 바로 위에는

9세기에 레오 6세가 만든 모자이크화로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가 보석 왕좌에 앉아 있고

비잔틴 제국의 황제였던 레오 6세가 예수 발 아래에 무릎을 꿇고 

 그의 아들의 죄를 사해 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레오 6세는 아들 콘스탄티누스에게 왕위를 물려주기까지

 4번의 결혼을 통해서 어렵사리 보위를 물려준 황제이다.

 

 

 

 

황제의 문 위의 모자이크

 

왼쪽 원안에는 성모 마리아,

 오른쪽 원안에는 대천사 가브리엘, 

예수의 왼손에는 글씨가 쓰여진 종이가 있는데

여기엔 이렇게 적혀 있다고 한다.

 

"Peace unto you; I am the lihgt of the world."  

평안을 너에게 주노라,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황제가 된 기분으로 중앙에 있는

제일 큰 문으로 들어갔다.

 

 

 

 

정복자 술탄 메흐메드 2세는

하기아소피아를 모스크로 바꿀 것을

 이슬람의 유명한 건축가 시난에게 명령했다.  

건축가 시난은 이슬람 요소를 추가했는데

그것은 미나렛(첨탑)과 미흐랍(이슬람 제대) 그리고

민바르(이슬람 설교대) 였다.

하기아소피아는 메카 방향에서

주축이 10도 정도 남쪽으로 틀어져 있는데

시난은 미흐랍, 민바르 등을

메카의 방향을 알려주기 위해 정면에서 오른쪽으로

약간 기울어지게 완성했다.

 

 

 

 

그리스도교를 상징하는 모자이크와

이슬람교의 코란이 어우러진 하기아 소피아의 실내

(인터넷에서)

 

 

 

 

1934년 터키공화국

 창시자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명으로

 대규모 복구사업을 거친 후

회칠로 사라졌던 비잔틴 모자이크들이 빛을 보게 되었으며

1935년부터 종교적인 성격을 버리고 

박물관으로써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

내부는 엘리베이터까지 설치되어 복구중이다

카톨릭과 이슬람 두 종교가 한곳에서 공존하는 아야 소피아.

정중앙 벽에 아기예수를 안은 성모마리아 모자이크를 볼수 있고

 돔 천장에는 아랍어로 코란 구절이 새겨진 서판도 볼 수 있다.

 

 

 

 

 1453년 천년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술탄 메흐메드 2세아야소피아의 역사적,예술적 가치를 알아보고

 3일간의 약탈 예외지역으로 선정하여 보호했다고 한다.

영원히 대립할 것만 같은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이

 함께 공존할 수 있게 만든 한사람의 관용이었다.

 

 

 

 

성화와 아랍서체 목판

 

기독교의 상징인 성화이슬람교의 상징인

아랍서체 목판이 함께 공존해 있는

아야소피아 본당을 보면서

 서로 배타적이고 너무나도 이질적인 것들이

참으로 아름다운 조화미를 보이고 있다는 것에

마음 속 깊이 깊은 감명을 받았다.

 

 

 

 

중간에 기둥을 받치지 않고

올린 중앙 돔의 높이가 56미터에 이르는

소피아 성당은 세계 8대 불가사의라고 일컬어질 만큼

과학적인 방법으로 축성되었다.

 소피아 성당은 당시 세계의 새로운 건축 양식으로 등장했다.

 돔 양식의 건축물은 소피아 성당이 최초였으며,

이후 이스탄불의 주요 사원은

 모두 소피아 사원 양식을 모방하였다.

 

 

 

 

거대한 돔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연결된 회랑이 있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하나로 이루어진 중앙 홀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연결된 회랑은 원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직사각형 모양이란다.

직시각형으로 된 ​건물 측면 복도로부터

하기야 소피아의 가운데 공간에는 큰 기둥들이 107개가 있는데

40개는 아래층에 67개는 위층에 있다고 한다.

 

 

 

 

돔 아래 성모자상 모자이크 벽화

 

 돔 지붕 아래

 그리스도를 안은 성모 마리아를 중심으로

좌우에 가브리엘과 미카엘천사가 새겨져 있다는데

잘 보이진 않았다.

 현존하는 최고로 오래된 모자이크라 한다.

양쪽에는 아라비아 서체로

 "알라는 유일하다"와 무하마드는 알라의 사자라고 쓴

캘리그라피(아름다운 서체)가 있다.

그야말로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가 함께 공존하고 있다. 

 

 

 

 

돔 아래 성모자상 벽화

 

중앙의 반구돔에 있는 

 아기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 모자이크

 

 

 

 

 

성모자상 벽화

 

좌, 우에는 가브리엘과 미카엘 천사상이 있는데

왼쪽 가브리엘 천사의 모자이크는 볼 수 없고

오른쪽 미카엘 천사상은 완전하지는 않지만 볼 수 있다.

 

 

 

 

미카엘 대천사 모자이크

 

가브리엘 그리고 라파엘과 함께 세 대천사 중 한 명으로 

훼손된 그림으로는 그의 완전한 모습을 알수 없지만

미카엘 대천사는 용과 싸우는 전사로

또는 최후의 심판 날

죽은 자의 선악의 영혼의 무게를 재는 모습으로 유명하다.

 

 

 

 

돔 부근의 세라핌 모자이크

 

돔을 받쳐주면서 네 코너에 있는 아치 사이에 

3쌍의 날개가 달린 세라핌천사

(인간과 닮은 모습으로 세쌍의 날개를 가진 천사)가 그려져 있다.

원래 전체 길이가 11m 였던 이 천사들은

얼굴이 각각 사자, 황소, 독수리,그리고 천사의 모습이었으나

현재는 다각형의 별모양으로 덮여 있다.

(이슬람은 얼굴이나 동물의 모양 등은 우상이라하여 금기시한다.)

 

 

 

 

다각형의 별모양으로 덮여 있는 세라핌

(인간과 닮은 모습으로 세쌍의 날개를 가진 천사)

 

 

 

 

복원되어 얼굴이 나타난 세라핌

(인간과 닮은 모습으로 세쌍의 날개를 가진 천사)

 

 

 

 

성소피아성당의 뛰어난 건축기술을 나타내는 것은

동서 77m, 남북 71.7m로

중앙에는 높이 56m에 지름이 33m나 되는 거대한 돔 지붕이다.

 보통 소피아 사원의 영향을 받았다는 이슬람 모스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돔 지붕에는 돔을 지탱하는 4개의 기둥이 존재하지만

 이곳 소피아 사원의 엄청난 돔을 지탱하는 기둥은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다.

 6세기 경 이정도 높이(15층 건물 높이에 상당함)로 지었고

 거기다 기둥 없는 돔구조로 만들었다는게 믿기지 않는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두 명의 비잔틴 건축가

이시도로스와 안테미오스에게 성당의 설계를 맡겼다.

​두 명 모두 수학과 물리학 교수로

이론은 뛰어났지만 실제 경험은 전무 했다.

황제는 이들에게 두 가지만을 당부했다고.

빨리 지을 것.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교회를 만들 것.

그래서 이들은 30미터가 넘는 돔을 계획하고 이전에는 없던

특별한 건축기법인 삼각궁륭공법을 사용한다.

돔의 무게를 4개의 아치에 분산하는 것이다.

이 건물을 짓기 위해서 백 명의 건축 대가들은

만 명의 작업자들을 감독했다.

즉, 백 명이 한조로 구성된 백 개의 작업팀이 있었다.​

​공사는 6년이 지난 537년 완공된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르네상스 이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큰

기독교 건물을 지음으로써 콘스탄티노플의 위상을 높혔다.

 

 

 

 

 

 

 

페르가몬에서 가져온 항아리

 

사원 입구의 오른쪽과 왼쪽에 놓여 있는

1,250리터의 거대한 대리석 항아리는

16세기에 무라드 3세 떄

페르가몬의 고대도시에서 가져온 것으로

헬레니즘문화를 엿보게 한다.

 

 

 

 

 

중앙부분의 거대한 돔 둘레에는 40개의 창문이 있다.

 

 

 

 

두 종교가 있는 정면

 

스테인드글라스

 바로 아래에 미흐랍 (이슬람 제단)이 있는데

스테인드글라스는 정면을 향하고 있고

미흐랍은 정면에서 옆으로 살짝 비켜 나 있다.

이는 종교가 다른 각자의 신이 있는 방향을 의미한다고.

이 곳처럼 서로 관용을 베푼다면 세계 평화가 오지 싶다.

 

 

 

 

중앙 미흐랍(Mihrab) 이슬람 제단

 기도하는 사람들이 메카를 향하도록 방향을 알려준다.

 

우측 민바르(Minber) 이슬람 사원의 설교단

이슬람의 지도자인 이맘이 이곳에서 매주 금요일 설교를 하는데

   설교자는 예언자 무함마드를 위해

   마지막 계단에는 올라서지 않는다고 한다. 

​설교단 바로 앞 사회자의 자리에서

 사회자가 코란을 읽는다.

 

 

 

 

술탄의 좌석 Sultan's Lodge 

 

제 3대 정통 칼리프인 우트만

   술탄이 기도할 때 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특별히 만든 곳으로 가려진 장식 안에서 술탄이 기도했다.

   19세기 포사티의 복원때 만들어졌다.

 

 

 

 

소피아 대성당 안의 옴팔리온 (세계의 중심)

 

성당의 중앙을 빗겨선 자리에

3-4미터 정도의 원형 대리석이 바닥에 깔려있고

주위에는 쇠줄로 출입을 막은 곳이 있었는데

이곳이 바로 비잔틴 문화를 대표하는

 당시의 동로마제국이 세계의 중심점이라고

 옴팔로스 혹은 옴팔리온(Omphalion)으로 정해 놓았던 자리다.

황제가 예배를 지켜보던 곳으로

아름다운 색깔의 대리석이 수 놓아져 있는데 

   배꼽이라는 뜻으로 이곳에서 황제대관식을 거행했다.

이는 비잔틴의 황제가 곧 세계의 황제라는

나름대로의 의미를 지니고도 있다.

 

 

 

 

Muezzin Gallery

 

무엣진은 기도 시간을 알리던 사람들로

   그들이 모여 있던 공간이다.

 

 

 

 

 대리석들을

모두 판으로 잘라내어 대칭으로 붙인것을 알 수 있다.

벽면이 큰 대리석 한 판으로 되어 있어

깨어지면  보수가 되지 않는다고.

 

 

 

 

2층으로 오르는 통로

 

본당 왼쪽 끝에는 2층으로 오르는 길이 있는데

2층은 여성들이 예배를 보는 장소이자 종교회의 때 사용되던 곳으로,

여왕의 명령으로 길을 경사길로 만들었는데

이는  여성들이 가마를 타고 올 때

기도하고 있는 여왕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2층 갤러리

 

2층 회랑의 갤러리 동쪽과 남쪽 벽면에는

9세기 중반부터 그려진

 황금으로 도금된 모자이크 작품들이 있다.

이 곳의 모자이크화는 대부분 9세기 이후의 작품들인데

아야소피아의 완공년도를 생각하면

삼백년의 공백이 생긴다.

이유는 차례에 걸쳐 일어난 성상숭배금지령 때문이다.

대부분은 그 시기에 파괴가 되었고

지금 남은 것들은 그 이후의 작품들이다.

회칠로 덮혀 있던 아야소피아의 모자이크화는

1930년 이후 미국의 ​비잔틴 고고학 연구소의

학자들의 조사 수복에 의해서 밝혀지고 복원되기 시작하였다.

 

 

 

데에시스(최후의 날) 황금 모자이크

 

아야 소피아 성화중

가장 인기 있고 백미로 꼽히는 2층 남쪽벽에 그려진 벽화로

 예수를 중심으로 왼쪽에 성모 마리아와

오른쪽에 세례 요한이 묘사되어 있는데

마치 살아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정교하다.

그림의 아래 부분은 전하지 않지만

그들의 표정이 그대로 남아 있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더 실감나게 전해 준다. ​

성모와 요한의 눈빛은 닮아 있고

이 둘은 그림의 제목처럼 예수께 전 인류의 죄를 사해 달라며

간절히 바라고 있는 모습이다.

 

 

 

 

데에시스(Deesis)

 

 르네상스 이전 그림의 표정이 살아있다는게

 이 성화의 첫번째 특징이고,

 두번째는 예수님의 얼굴과 눈동자다.

 예수님의 얼굴이 정면을 바라보면서도

왼쪽(햇빛이 드는 쪽)이 약간 작고, 반대편을 크게 그렸다.

 이런 방식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자리자에서와 같은 기법이라도 한다.

그리고 눈동자가 약간 사팔느낌이 나게끔 표현하여

 좌든 우측이든 간에 예수님의 눈빛을 피할 수 없도록

표현했다고 한다.

4차 십자군 원정때 2/3가 훼손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남은 부분만으로도 아야소피아

 최고의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고 한다.

 

 

 

 

예수님 뒤의 후광에만 십자가가 있다.

 

카톨릭에서 분리된 정교회에는

데에시스(deesis, 최후의 날, 심판의 날, 간절한 기도)의 전통이 있다.

기독교 미술 주제의 하나로 비잔틴의 대표 벽화이다.

 그리스도가 당당하게 옥좌에 앉아 있고 성모 마리아가 한 편에,

 사도 요한이 다른 편에 있는 그림인데,

이 셋이 최후의 심판을 진행하는 핵심 그룹이다.

 요한은 계시록 때문에 최후의 심판과 연관된다.

 

 

 

 

남쪽 갤러리 마지막 끝 구역에는

두 개의 모자이크화가 나란히 그려져 있다.

 

 

 

 

 왕좌에 앉아 있는 마리아와 축복을 내리고 있는 아기예수

그리고 요한네스 2세와 이레네 황후 (1118)

 

오른 편에 있는 모자이크 화는

12세기에 제작되었고

요한네스 2세 황제와 이레네 황비를 그렸다.

중앙에 예수를 안은 성모가

좌측에는 요한네스 2세가 봉헌금을 가지고 있으며,

우측에는 이레네 황비가 두루마리를 들고 있다.

이레네는 797년부터 802년까지 비잔티움 제국의 여황제였다.

레오 4세의 황후였고 어린 아들 콘스탄티누스 6세의 섭정이었다가

아들의 눈알을 뽑고 퇴위시킨 뒤 단독으로 제위에 올랐다.

성상파괴령을 철회하고 성상공경을 부활시켜

 동방정교회의 성인으로 인정받았다.

오른쪽 벽면에는 결핵으로 사망한 그녀의 아들,

알렉시우스(Alexius)가 그려져 있다.

 

 

 

 

아기예수와 성모마리아, 요한네스 콤네노스 2세 황제와 이레네 황후,

그리고 한쪽 벽면에 그의 아들 알렉시우스가 있다.

 

요한네스 콤네노스 2세는 매우 관대한 왕으로

 자신의 암살음모를 꾸민 누나와 매형까지도 용서를 했다고,

 하지만 사냥 도중 입었던 패혈증으로 젊은 나이 요절했다고 한다.

 

 

 

 

하나 하나가 성스럽고 아름다운 모자이크 벽화들,

 보존 상태가 아쉬운 것들도 있지만,

 벽화들을 파괴하지 않은 술탄 메흐메드 2세에게

감사해야 할 따름이다.

 

 

 

 

앉아있는 예수를 중심으로 

 여황제 조에와 그녀의 세번째 남편 콘스탄티누스 9세의 모습

 

중앙에는 비잔틴예술에서 일반적으로

그려지듯 황금색 뒷 배경에 푸른색 옷을 입은 예수가

 왼손에 성경을 쥐고 무릎에 놓고 있고

오른손으로 축복을 내리는 모습을 취하고 있다.

예수의 후광 양쪽에 새겨져 있는 IC, XC 글씨는

헬라어로 예수를 의미한다.

예수의 양옆으로는 콘스탄티누스 9세와 조에 황후가

예복을 입고 서 있는데 각자 성당 건축의

기금을 상징하는 돈주머니와 두루마리를 받치고 있다.

 

 

 

 

모자이크에 누군지 써 있기 때문에

누군지 알 수 있다고 한다.

 

이 모자이크에서 조에 여왕은 11세기에 처음 결혼한

그녀의 남편인 로마노스 3세와 함께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남편이 죽고 새로 결혼을 하면서

황제의 얼굴과 황제 머리 위에 씌여진 문구가 바뀌었다.

현재의 모습은 그녀의 세번째 남편 콘스탄티누스 9세의 모습이다.

그 당시 조에 여왕의 지위가 더 높아,

여왕이 3번 결혼할 때마다 황제의 얼굴을 다시 새겼는데

여왕의 모습은 젊었을때의 모습 그대로고

남편들은 몸통은 놔두고 얼굴만 바꾸었다고 하니

실제로는  연하의 남편들이었다고 한다.

비잔틴 모자이크화는 손상이 많아 재연한 판넬그림이 세워져 있다.

 

 

 

 

아르테미스신전에서 뽑아온

 코린트식 대리석 기둥들 색깔이 다른 것은

 대리석 산지에 따라 색깔이 다른 탓이라고 한다.

4개의 녹색 화강석 기둥은

에페스의 항구 체육관에서 가져온 것이며

 코너에 있는 한쌍의 반암 대리석 기둥은 바알벡(레바논)에 있는

아폴론 신전에서 가져온 것이라 한다.

아야 소피아에는 전체 107개의 기둥이 사용 되었는데

그 중에 40개는 본당에 나머지 67개는 2층 갤러리에 있다.

 

 

 

 

무게가 30톤이 넘는다는 아르테미스신전에서 뽑아온 기둥들

 

갑자기 아야 소피아 성당을 지어야 했던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은 재료 부족에 시달렸는데

이에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 레바논의 아폴론 신전 등에서

 뽑아올 수 있는 멀쩡한 기둥들은 다 뽑아와

아야 소피아의 기둥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기둥들을 그 짧은 기간에 어떻게 운반했는지는

 아직도 모른다고 한다.

수레바퀴던 배던 그당시 운송 가능한 수단으로는 

5년 10개월만의 공정 기간안에 옮기기엔

불가능했을거라고 한다는데

 그럼 어떻게?

 

 

 

 

 

2층에서 바라본 1층의 모습

 

 

 

 

실제 금으로 만든 천장 모자이크

 

대성당 벽과 코너에는 8개의 거대한 원판들이 있는데

이 원판에는 알라와 이슬람 지도자들의 이름이 쓰여져 있다.

성모자상 밑의 미흐랍 오른쪽에는 알라신, 왼쪽에 무하마드,

양 옆에는 이슬람 초기 4대 칼리프인

에부 베키르, 외메르, 오스만, 알리의 이름이

입구 양 옆에는 무하마드의 손자이자 칼리프였던

하산과 후세인의 이름이 쓰여져 있다.

직경이 7.5m인 이 원판들은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달필이라고 한다.

 

 

 

 

캘리그라피

 

성모자상 밑의 미흐랍

오른쪽에 알라신, 왼쪽에 무하마드라고

아랍에서 제일 아름다운 서체로 쓰여 있다.

 

 

 

 

캘리그라피 ( 아름다운 서체)

 

오스만 투르크

 최고의 서예가였던 이제트가 글자를 쓴

직경이 7.5m인 타원인 원판은

15억이 넘는 이슬람에서 최대의 크기라 한다.

왼쪽 무하마드

오른쪽 무하마드의 손자인 하산의 이름이 쓰여 있다.

 

 

 

 

정자모양의 화려한 무늬의

술탄 로지가 캘리그라피 밑에 보인다.

 

 

 

 

소피아 성당은 보수를 위해 철제 빔을 짓고 있는데

보수에는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한다고.

 

 

 

 

비잔틴 양식의 아치

 

대리석 기둥위의 장식이 정말 섬세하고 아름답다. 

 

 

 

 

여왕지정석

 

비잔틴의 여제들이 전통적으로 예배를 올린 곳을 표시한다.

 

 

 

 

지진으로 균열된 대리석 바닥

 

 

 

 

 실제로 금을 사용하여 만든 천장의 화려한 모자이크

 

 

 

 

기둥 아래쪽

까만 고리처럼 생긴 부분이 납으로 된 부분인데

저 역할이 바로 지진이 일어날때 댐핑을 가해줘서

충격을 완화시켜 주는 장치다.

 하지만 이 기둥도 50년 전의 진도 7.9의 지진으로 

 많이 기울어졌다고 한다.

 

 

 

 

각종 기념품을 파는 곳이다.

이곳에서 히포드롬의 청동 뱀기둥 원형을

볼 수 있다고 했는데 

시간이 없어서 살펴보지를 못했다.

 

 

 

 

엔리코 단돌로의 무덤 

 

800년전 콘스탄티노플 제 4차 십자군전쟁에 참여하여

콘스탄티노플을 침략했던 베네치아의 도제

엔리케 단돌로의 무덤이 2층 한쪽 구석에 있다. 

도시 주민들에게 큰 미움을 샀던 그의 시신은 도굴당했다.

그는 성지 예루살렘 탈환이라는 십자군의 목표를 도외시 한 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뒤 성당 안에 있는 집기를 모두 약탈하고,

 돔과 벽면의 황금으로 장식한 모자이크들의 황금을 벗겨내었다.

그가 가져간 청동 말이 아직도 산마르코 대성당에 놓여져 있으니

그에 대한 평가는 어느쪽에 서느냐에 따라 극명하게 갈린다.  

 역사는 하기야소피아에서 행한 4차 십자군의 만행을

‘인류학적, 문화사적으로 콘스탄티노플 최대의 비극’이라고 적고 있다.

 

 

 

 

 

남서쪽 출입문 위 모자이크 (944년)

 

 출구로 나기기 전에

하기아소피아의 백미 중 하나인 

모자이크 하나가 남았는데 

황제의 문 회랑 오른쪽 끝에 있는

나가는 문 위에 있어 그냥 지나치는 수가 많다고 한다.

나가는 길에 놓치지 말라고

거울을 붙여 뒤쪽에 모습이 보이도록 해놓았다는데

모이는 시간이 빠듯해 나는 놓쳤다.ㅠ

그래서 인터넷에서 찿아 올렸다.

 

 

 

 

 

 모자이크 벽화 속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아야소피아에서 가장 잘 보존된 10세기에 제작 된 모자이크화로

 아기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아와 두 명의 황제가 그려져 있는데,

오른쪽은 콘스탄티노플을 봉헌하는 콘스탄티누스대제이며,

왼쪽은 하기야 소피아를 봉헌하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이다.

성모 마리아 후광 양 옆에는

성모 마리아를 뜻하는 그리스 결합문자가 새겨져 있고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바로 옆에는

위대한 성자 콘스탄티누스 황제라 써 있다.

일반적으로 동방정교회에서는 중앙에 성모 마리아가 위치하고

왼쪽에 황제 오른쪽에 황후의 순으로 나타낸다.

 

 

 

 

 성 그레고리 중심주 Sweeping Column

 

왼쪽 복도의 앞부분에 있는 직사각형의 대리석 기둥은

일명 소원의 기둥, 또는 땀 흘리는 기둥이라고 불린다.

이 기둥에 있는 내부가 약간 젖어 있는 구멍에 엄지 손가락을

집어 넣고 몸을 움직이지 않은 채 손바닥을 360도

한바퀴 돌리면서 소원을 빌면 그것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사원 안을 거닐다가

두통이 심해져 기둥을 잡고 머리를 기대었는데

신기하게도 이 때부터 두통이 사라졌다고 한다.

훗날 사람들이 몸이 아프면 이 곳에 와서 기둥을 만지기 시작했고

그 흔적으로 기둥 가운데가 움푹 패여 있다고 한다.

지금은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풍문때문에

관광객들이 줄을 서서 돌리고 있다. 

꽃보다 누나에서 이미연씨가 돌려 성공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여기도 모이는 시간이 빠듯해 가보지 못했다.ㅠ

역시나 인터넷에서...

 

 

 

 

황제의 문이 있는 복도로 나왔다.

 

 

 

 

버스 타기 전 화장실 가는 중... ㅋ

 

 

 

 

아테네와 에페소스에서 운반해 온 그리스양식의 기둥들

 

아야 소피아성당 외부 정원에 서 있는

 그리스 양식의 둥근 기둥들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아테네와 에페소스에서 운반해 온 것이라고 한다.

 

 

 

 

 

 

아야소피아성당을 짓기 전에 있던 아야소피아성당 터

 

성당 건물로 들어가기 전에 왼편에는 카페가 있고

맞은 편에는 세번째 하기야 소피아를 지을 때 나온

두번째 건축 시기인 테오도시우스황제때 (기원 전 415~ 532)

 건축되었던 건축물의 잔해들이다.

 지금은 지각이 많이 융기되어 이보다 높은 지역에 있다고 했다. 

 

 

 

 

 

줄을 길게 선 화장실 벽에 있던 벽화

 

 

 

 

 

유스티니아누스황제가 원하는 규모의 건물을 짓기 해서는

 엄청난 벽돌이 필요했는데 문제는 벽돌의 무게였다.

건물이 높아질수록 건물 그 자체의 무게로 인하여

붕괴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은 로도스의 진흙에서 그 해답을 찿았다.

로도스의 진흙으로 만들어진 벽돌은

가볍고 속이 비어있어 안성맞춤이었다.

게다가 이 벽돌은 지진으로 균열이 가더라도

벽돌 자체가 녹아 빈분을 메꾸어 접착이 된다는 점이다.

이 벽돌의 단점은 외관이 투박하기 때문에 벽돌 바깥쪽은

아름다운 무늬가 있는 대리석으로 덮었다.

 

 

 

 

 

 

 

이 곳은 블루모스크와 달리 유료로 입장하기 때문에

 밤에는 개방을 하지 않는다.

 

 

 

 

술탄들의 영묘

 

   Sutaln SelimⅡ, Murad Ⅲ, Mehmed Ⅲ가

   이 곳에 묻혀 있다.

 

 

 

 

 

 

이슬람의 상징인 초승달

 

 

 

 

터키는 아이들도 밝고 친절한 것 같다.

 

 

 

 

튜울립은 네덜란드의 국화인 동시에 터키의 국화이다.

투루크족들이 중앙아시아에서 나올 때 튜울립을 가져 나왔고

이 꽃이 다시 네덜란드로 들어갔다고 한다.

 

 

 

 

맞은편에 있는 블루모스크의 전경을 담을 수 있다.

 

오스만 시대에 지어진 술탄 아흐메드 모스크는

규모면에서 터키 최대의 것으로,

맞은편에 있는 성 소피아 성당에 대한 이슬람 세력의 우위를 상징하기 위해

 그 양식을 모방, 발전시켜 건축한 독특한 형상의 회교사원이다.

 그 내부의 벽과 기둥이 푸른색의 타일로 장식되어 있어

 블루 모스크라고도 불리워지고 있다.

돔의 200개가 넘는 조그만 창은 스태인드 글래스로 장식되어 있다.

 

 

 

 

 

시티 투어 버스

 

 

 

 

 

하기야소피아 근처에 있던 상점 

 

 

 

 

여행사 홈피에서 가져 온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