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터키 이스탄불] 보스포루스해협 유람선, 돌마바흐체궁전

푸른 바다. 2015. 8. 30. 01:44

보스포루스해협 유람선, 돌마바흐체궁전

 

 

 

 

 

그리스, 터키 여행 8일째 2015년 4월2일 목요일

 

 

 

돌마바흐체 궁전의

 화려함을 보리라고 기대했었는데 선택관광이

궁전의 휴관으로 인해 물 건너 가버리고

이제 이스탄불에서의 마지막 일정인

 보스포루스 해협 유람만이 남아있다.

점심식사를 하고 유람선에 올라 보스포루스를 느끼고 나면

너무나 아쉽지만 이스탄불을 떠나야 한다.

언제나 여행의 끝자락에서는

 보지 못한 것들에 대한 아쉬움으로 마음이 싸해지지만

그래도 이만큼이라도 보고 가슴에 담아가게

해 주심에 항상 감사드린다.

비잔틴제국, 오스만제국을 꼭 가보리라 했던

학창시절의 꿈이 이루어졌다.

 

 

 

 

 

토프카프 궁전을

 보고난 뒤 점심식사를 하러 가고 있다.

 

 

 

 

동서양 문명의

 공존이라는 말이 이스탄불보다 적합한 곳은 없다.

이스탄불은 인류 최초의 문명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시발점이며

이후 5천년 인류 역사의 주무대였다.

 이스탄불의 옛 이름은 콘스탄티노플, 비잔티움.

 1,600년 간 로마, 비잔틴제국,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수도로 영광을 누렸다.

초기 기독교, 그리스정교, 이슬람 문화가 모두 이 곳을

 중심으로 번성한 것이다.

그리스의 열주와 로마의 건축, 비잔틴의 건축과 이슬람의 모스크가

 1km 이내에 공존하는 세계 유일의 도시, 바로 이스탄불이다.

 

 

 

 

테오도시우스 로마 성벽

 

A.D. 5세기 테오도시우스 2세 통치 당시에 건축된

아직까지도 완연한 형태로 보존되고 있는 로마시대 성벽이다.

마르마라 바다에서 골든 혼까지 연결되어 있고,

 길이는 6.5km로서 내부 방어벽, 외벽, 그리고 해자로 되어 있어서

방패 같은 성벽으로 적들로부터 천년 이상을 지켜 왔을 뿐 아니라

중세 유럽의 역사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오스만 터키가

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계책은

 배를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골든혼 해협 쪽으로 갈라타지구의 육로를 통해 넘긴 것이었다.

 정복자 메흐메드 2세는 골든혼 해협 입구를 쇠사슬로 막아놓고

아시아 쪽에서 유럽 쪽을 넘보는 군대만 경계하던

비잔틴 제국의 뒤통수를 쳤다.

 당시 이미 쇠약해 있던 비잔티움 제국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면서 결정적으로 멸망했다.

이렇듯 유럽 쪽의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면서,

오스만 터키는 두 대륙을 갈라놓은

보스포루스 해협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이곳을 허가 없이 지나는 배들은 이후 사정없이 공격당했다.

 

 

 

 

골든 레스토랑

 

이 레스토랑에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숯불 회전구이인

 되네르 케밥으로 점심식사를 하고 유람선을 타러 갔다.

식사 사진은 따로 포스팅을 해 두었다.

터키는 가정집이든 상가든 공공건물이든

창문유리가 그야말로 유리알 처럼 깨끗하다.

터키 사람들은 유리창 닦는 일을 매우 열심히 하는데

이유는 알라신의 축복이 가득 들어오라고 그런단다.

 

 

 

 

이스탄불은

 보스포러스 해협,  마르마라해, 골든 혼 강줄기로

세 개의 물줄기가 만나는 도시이다.

 흑해와 지중해 사이, 유럽과 아시아 양 대륙에 걸쳐 있는

도시로서 양 대륙을 잇는 가교이다.

보스포러스 해협의 남쪽의 이스탄불 시가는

유럽지구와 아시아지구로 나뉘어 있다.

 아시아지구는 주로 주거지역이고,

유럽지구는 성소피아 성당, 블루 모스크, 토프카프 궁전 등

화려한 건축물들이 집중되어 있다.

 

 

 

 

50분 정도 탄 보스포루스 유람선 운행 루트

 

 

 

 

보스포루스해협 유람선에 오르고 있다.

 

 

 

 

현재에는

 해협의 아름다운 모습을 즐기려는 관광객들에 의해

보스포루스 크루즈의 인기가 상당히 높다.

그리고 여러 종류의 투어 코스가 있다.

 

 

 

 

 

 보스포루스 해협

 

지중해인 마르마라해 (마르는 대리석이란 뜻으로 특산물)와

흑해를 연결하는 해협으로

길이는 30km, 너비는 550∼3,000m, 수심 60∼125m의 좁은 해협이다.

 물살이 빨라서 소용돌이 치는 모습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아시아 대륙과 유럽 대륙과의 경계를 이룬다.

 

 

 

 

우리나라보다 8배나 넓은 터키는 유럽에서

유일하게 식량의 자급자족이 가능한 농업국가로

아시아와 유럽은 이스탄불에서 만난다.

하나의 도시는 두 개의 대륙에 걸쳐 있다.

 보스포루스 해협을 사이에 두고

이스탄불의 서쪽은 유럽, 동쪽은 아시아이다.

 유럽 지역은 보스포루스 해협의 출구인 골든 혼을 기준으로

 다시 남쪽의 구시가와 북쪽의 신시가로 나뉜다.

 

 

 

 

아타튀르크 다리

 

유럽지구의 신시가지와 구시가지를 잇는

골든 혼에 있는 다리 중 하나이다.

 

 

 

 

아타튀르크 다리의 왼쪽에 있는

뉴 브릿지(골든 혼 메트로 다리 ?)

 

 

 

 

뉴 브릿지(골든 혼 메트로 다리)

 

현재 바다 아래로 기차 터널을 건설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SK가 주도하는 컨소시엄이

 2층 구조의 자동차 도로 공사를 시작하였다.

 5.4Km의 거리로 2016년에 완공될 것으로 예상되며,

이스탄불 시내의 교통체증 완화에

많은 도움이 되리라 한다.

 

 

 

 

언덕위 쉴레이마니예 모스크

 

 보스포루스해협은

 오랫동안 군사적인 요충지로 알려져 왔으며,

 특히 18세기 이후에는 다르다넬스 해협과 함께

해협의 항행권을 둘러싼 해협문제로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지형적으로는 일종의 익곡으로

 양안은 급사면을 이루고 있으나 풍경이 매우 아름답다.

 

 

 

 

그 옛날 비잔틴 시대에는

 이 해협의 봉쇄를 위하여

양 안에 쇠로 만든 굵은 줄을 설치 해 두고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과하는 배를 통제하였다고 한다. 

 

 

 

 

이스탄불 구시가지의 예니 자미(모스크)

 

1597년에 술탄 무라드 3세(1574-1595 재위)의

왕비 사피예의 후원으로 건축을 시작했다.

당시 유대인들이 주로 거주하던 에미뇌뉘 부두 인근에

이슬람 교세를 확장하기 위한 것이 건축 목적이었다.

 그러나 공사 예산이 지나치게 많다는 왕실 내부의 반대로 공사가 지연되고,

 중간에 화재를 겪는 등 우여곡절 끝에 사피예 왕비가 사망한 뒤인

1665에서야 완공될 수 있었다.

예니 자미에 딸린 시장은 현재 이집트바자르이다.

 

 

 

 

 왼쪽의 탑은 베야짓 탑, 오른쪽 쉴레이마니예 모스크

 

아시아와 유럽 사이에 위치한 보스포루스 해협은

 예로부터 국제무역의 중심지였다.

 

 

 

갈라타 다리 밑에는

고등어케밥 등 각종 케밥들을 파는

 레스토랑이 즐비하다.

 

 

 

 

갈라타 다리

 

도개교로서, 총 길이는 490m이고, 폭은 42m이다.

 양방향으로 각각 3차선 차도와 도보가 있으며, 중앙에 트램 노선이 지나간다.

기록에 따르면 골든혼에 처음 다리가 놓인 것은 6세기 부터였다.

 동쪽의 갈라타 지구와 서쪽의 에미뇌뉘를 잇는

현재 자리에 다리를 놓고자 처음 시도된 것은

술탄 베야지트 2세(1481-1512 재위) 재위기인 1502년이다.

당시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에게 설계를 의뢰했으나

기술적인 문제로 건설되지 못했다.

 

 

 

 

갈라타 다리

 

그 후 1845년에 술탄 압둘마지드(1839-1861재위)의

 어머니 발리데 왕비의 명령으로 최초의 다리가 놓였고,

 18년간 사용되었다.

 1863년에 술탄 압둘아지즈(1861-1876 재위)가 다리를 재건했고,

 1870년에 프랑스 회사에 의해 확장 공사가 시작되어

1875년에 완공되었다.

 이 다리는 1912년에 철거되어 상류로 옮겨졌으며,

 현재 구 갈라타 다리로 불린다.

1912년에 독일 회사가 놓은 새 다리는 길이 466m, 폭 25m이며,

1992년에 화재로 파괴되기 전까지 사용되었다.

현재의 다리는 터키 건축회사에서 놓은 것으로 1994년에 완공되었다.

[출처: 두산백과]

 

 

 

 

신 시가지 갈라타 타워의 일부가 보인다.

 

 

 

 

갈라타 타워

 

14~15세기에 제노바 인들이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하여 전망탑으로 지어졌다.

후에 아흐멧 2세가 그 높이를 낮추었다.

 

 

 

 

멀리 있는 곳을 줌으로 당겨 찍었다.

 

 

 

 

보스포루스 해협의 곳곳의

 바닷물의 흐름이 대단히 빠르다고 하더니 과연...

 

 

 

 

비가 오고 바람도 많이 불어

유람선내에서 창으로 보스포루스를 지켜 보는

일행도 많았다.

그러나 나는 스카프로 머리를 싸매고

끝까지 바람과 비와 싸우며 보스포루스를 찍었다.

용감한 푸른바다 ㅋ

 

 

 

 

유람선에서 바라 본스포루스 해협

인류 문명이 교차하던 바다고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해주는 바다며

천년고도 이스탄불 감싸고 있는 바다다.

그런데 바다에도 요정 이오가 암소로 변하여

 건넜다는 전설이 있다.

 

 

 

 

보스포루스 이름의 전설

 

신중의 신 제우스가  절세미인 요정 이오를 사랑하여

 인간의 땅으로 내려와 이오와 사랑을 나누게 되었다.

그들 둘 만이 있는 장소는 혹시 헤라가 볼까하여 구름으로 가렸는데

헤라가 이를 의심하고 알아채자

 제우스는 이오를 아름다운 암소로 변신을 시킨다.
헤라이오를 감시하기 위하여

제우스로부터 예쁜 암소를 가지고 싶다고 하여

결국은 암소로 변한 이오가 헤라의 손에 넘어가게 되는데

 헤라는 눈이 100개 달린 아르곤으로 하여금 이오를 감시하게 한다.

한편 제우스에게 부탁을 받은 심복 아들인 전령의 신 헤르메스

 양치기로 변하여 풀피리 소리로 아르곤을 잠재운 후 죽이게 된다.

그러자 분노한 헤라는 아르곤의 눈을 떼어서

날짐승인 새에게 붙여서 다시 이오를 감시하게 하는데

 이 새가 공작새라고 한다.

하지만 이후에도 헤라의 괴롭힘은 계속 되는데

암소로 변신된 채로 있던 이오에게 쇠파리를 보내 못살게 군다.

암소가 된 이오가 쇠파리를 피해 도망 다녔던 지역들은

이후 그녀의 이름을 따서 지은 지명들이 생겼는데

 터키 땅을 지남으로서 지금의 터키가 이오니아라고 불리우게 되었고,

이오가 지난 바다는 바로 '암소가 건너다.'라는 뜻을 지닌

보스포루스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집트로 간 이오는 아름다운 여신 이시스가 되었다고.

 

 

 

 

멀리 있는 곳을 줌으로 당겨 찍었다.

 

 

 

 

아가사 크리스티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으로 유명한

오리엔트 특급열차가 다니던 시절 

 유럽 대륙의 마지막 기차역이 이스탄불의 시르케지 역이다.

시르케지역은 개통된지 94년 만인

1977년  비행기로 인해 승객이 줄어들면서 문을 닫았다.

1883년부터 프랑스 파리와 터키 이스탄불 구간을 운행했던

 오리엔트 특급 열차는 여러모로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었다.

파리에서 출발하여 스위스 로잔, 이태리의 베네치아,

유고의 베오그라드, 불가리아의 소피아를 거쳐 이스탄불에 도착하는 이 열차는

사람들에게 최초로 유럽을 기차를 타고 횡단하는 경이로움을 안겨주었다.

고급스러운 교통수단이었던 오리엔트 특급 열차를

 주로 이용한 것은 부자와 고관들이었다.

그들이 이스탄불에 도착해서 묵을만한 호텔이 없는 것을 알아챈

 프랑스의 ‘국제 침대열차 회사’는 1984년에 ‘페라 팔라스 호텔’을 짓는다.

 터키 최초로 전기를 사용해 움직이는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었던 이 고급 호텔은

 아가사 크리스티가 머물며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을 저술했던 장소로도 유명하다.

 지금도 411호는 아가사 크리스티 기념 룸으로 남아있으며,

‘아가사 크리스티 홀’이 있어

당시의 인테리어를 잘 보존된 형태로 방문자들에게 보여준다.

 

 

 

 

 

유람선을 타고 이 해협을 지나면,

양측 해안에 남아 있는 고대 유적지들과

아름다운 터키의 전통마을과 별장등을

눈 앞에서 볼 수 있다.

 

 

 

 

 

이스탄불 구 시가지

 

 

 

 

 

 

돌마바흐체 자미

 

 

 

 

돌마바흐체 자미(모스크)돌마바흐체 궁전 시계탑

 

 

 

 

돌마바흐체 궁전 시계탑

 

가득한 정원이란 뜻을 가진

 돌마바흐체 궁전 정문 앞에 있는 시계탑이다.

 1890년 술탄 압둘 하미트의 명령으로 건축가 사르키스 발얀에 의해

 세워진 이 시계탑은 높이가 27m인 4층으로 되어 있다.

탑의 사면 꼭대기에는 프랑스 폴 가르너의 시계와

오토만 제국 왕실의 상징인 엠블렘이 있다.

 

 

 

 

오스만 제국의 두 번째 궁전인 돌마바흐체 궁전이다.

1843년에 착공해서 1856년에 완공되었으나,

토프카프 궁전에서 거주한 마지막 술탄이기도 하고

돌마바흐체 궁전의 첫 술탄이기도 한

 압둘 메지드 1세 이후 6명의 술탄만이

 이곳에서 거주하였다.

 

 

 

 

돌마바흐체 궁전

 

17세기 초 보스포루스 해협의 조그마한 만을 메우고

 정원을 조성하여 술탄을 위한 간소한 별장으로 지어진 곳이다.

본래 목조 건물이었으나, 1814년의 대화재로 대부분 불타고

건축가 Karabet Balyan이

술탄 압둘 메지드 1세의 명령으로

 1843~1856년 대리석으로 새로 궁전을 지었다.

유럽의 바로크 양식과 전통의 오스만 양식을 접목시켜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을 모델로 하여

바로크와 로코코 양식으로 지은 유럽풍 건축물이다.

 

 

 

 

돌마바흐체궁전

 

정원으로 가득 찬 곳이라는 뜻인 돌마바흐체 궁전은

오스만제국 건축양식의 마지막 작품이자

두 번째 왕궁으로 베르사이유를 모방하여 만들어졌다.

오스만제국의 약화가 가속화되어 가는 시점에서

 서구화를 지향하고 국력쇄신을 도모할 목적으로 건립하였으나

 결과적으로 막대한 건축비는 어려운 왕실 재정을 더욱 약화시켜

오스만제국의 멸망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현존하는 궁전 중 가장 화려한 궁전이라는 평을 듣는

돌마바흐체궁전을 꾸미기 위해 들어간 금은14톤,

은은 40톤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15,000㎡의 면적의 궁전 안에는 285개의 방과 43개의 홀,

 6개의 터키식 목욕탕, 68개의 화장실이 있고

 화병은 280개, 시계는 156개가 있으며,

크리스탈 촛대 58개와 샹들리에 36개가 있다.

 

 

 

 

터키의 아버지 아타튀르크로 불리는

터키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무스타파 케말

수도를 앙카라로 이전했지만

이스탄불에 머물 때는 돌마바흐체 궁전을 관저로 사용했는데,

19381110일 오전 95분에 집무실에서 사망하자

그를 기리기 위해 궁전 안의 모든 시계는

그가 사망한 오전 95분에 멈춰 있다고 한다.

 

 

 

 

 1877년 오스만 제국 사상

처음으로 개원된 의회가 이 곳에서 열렸다.

 

 

 

 

그토록 화려한 궁전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대형 연회장인 황제의 방은

 넓이가 가로세로 40m에 중앙 돔의 높이는 36m에 달한다.

그곳에 걸려 있는 샹들리에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기증한 것으로,

 무게가 4.5톤이나 되며 750개의 등이 달려있다 하니

그 사치를 짐작해볼 수 있다.

 

 

 

 

돌마바흐체 앞에 보스포루스 해협이 시원스레 펼처져 있다.

바다로 통하는 문으로 유명한 술탄들의 선착장이 있다.

이 보스포러스 해협을 중심으로

 동쪽은 아시아이고 서쪽은 유럽이다.

 

 

 

 

왼쪽 보물의 문

 

토프카프 궁전이 오스만의 전성기였다고 한다면

돌마바흐체는 오스만 몰락을 상징하는 궁전이 되었다.

 

 

 

 

 

 

백조의 분수

 

아름다운 프랑스식 정원에 있다.

 

 

 

 

크리스탈 계단

 

 

 

 

이 기둥은

목조로 된 바닥에 무게를 줄이기 위해서

속에는 나무를 넣고 겉에는 돌로 장식했다고.

 

 

 

 

황제의 방천장에 매달려 있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에게 선사받은 750개의 전구로

장식된 샹들리에가 돌마바흐체 궁전의 백미다.

 

 

 

 

모든 것은 좌우 대칭이 되도록 하여

한쪽에 가구와 보물이 있으면 맞은 편에도

 반드시 거의 유사한 가구와 보물을 두었고,

 밑에 카펫의 경우 장인이 36년동안 제작한 것이라고.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기다리던 응접실

 

 

 

 

이슬람 그림

 

 

 

 

궁전내의 모든 시계는

이곳을 관저로 사용하다 1938년 11월10일 집무중 숨진

터키공화국 초대 대통령 아타튀르크를 기리기 위해

숨진 시각인 9시 5분을 가르키고 있다.

 

 

 

 

 

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세면대와 욕실

 

 

 

 

 

 

 

 

 

포 시즌 호텔

 

 

 

 

 

 

1867년 완공된 시라간 팰리스 켐핀스키 ciragan palace

 

터키를 방문하는 국빈들이 묵는다는 시라간 팰리스 켐핀스키호텔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여기 묵었다고 한다. 터키 최고인 5성 호텔이다.

19세기에 술탄 압둘아지의 거처로 사용됐던 궁전을

 세심한 복원 공사를 통해 호텔로 개조했다.

 톱카프 궁전에서 북쪽으로 약 2km 떨어져 있다.

 전 객실을 화려하고도 이국적인 인테리어로 단장하였고,

 발코니에서 탁 트인 보스포루스 해협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특히 이 호텔이 자랑하는 술탄 스위트는 유럽에서 가장 큰 스위트룸 중 하나로,

 왕실에 버금가는 품격 있는 인테리어와 최고급 시설을 갖추었다.

호텔 내 부설된 투그라 레스토랑도 인기 있다.

 고풍스러운 오스만제국 시대의 접시에 담겨 나오는

호화로운 식사를 즐길 수 있다.

 

 

 

 

보스포루스 대교 밑에도 안 가고 반환점을 돈다.

 

 

 

 

 

또 비가.... 

 

 

 

 

보스포루스 해협의 양 안에는 고급 주택 단지,

로마 시대의 옛 유적지, 관공서 등이 줄 지어 있다.

유람선을 타고 가면, 각종 선박 등이 분주하게 오고 간다.

이 해협을 중심으로 유럽과 아시아가 나누어 지는것을 생각하니까,

대륙의 경계선에 와 있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아시아 지구

 

 

 

 

 

이스탄불 아시아 지구이다.

 

 

 

 

길이 30㎞의 작은 바다로

 마르마라해와 흑해를 연결하고 있는 해협은

 양쪽 기슭을 따라 펼쳐지는 경치가 아름답다.

 

 

 

 

보스포루스 해협의

가장 좁은 지역은 600m정도이고

물살이 매우 거칠고 빨라서

소용돌이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고 한다.

 

 

 

 

크즈 쿨레시(처녀의 탑)

 

위스큐다르와 하렘 사이의 해안에서 200m 떨어진 앞바다에

떠 있는 탑으로 현재는 로칸다와 전망 카페로이용되고 있으나

원래는 12세기에 비잔틴이 만든 요새였고,

 1453년 오스만 투르크가 이스탄불을 정복한 후에는

운항하는 배로부터 통행세를 받던 감시소겸 등대였다고 한다.

 화재로 훼손 된것을 아흐멧 3세 (1703-1730) 때 재건,

술탄 마흐멧 2세(1808-1839)때 대대적인 보수를 한 이 섬은

 다양한 전설의 무대가 되었다고 한다.

 

 

 

 

처녀의 탑

 

옛날에 어느 왕이 정말 사랑하는 공주가 있었는데

 예언가가 말하기를 이 공주는

18세가 되기 전에 뱀에 물려서 죽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왕은 공주를 살려야 한다는 마음으로

바다 한가운데에 탑을 하나 지었다.

 육지가 아닌 곳이니

 뱀에게 물릴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18살 되는 해의 생일날

왕이 선물로 보낸 과일 바구니 안에 숨어있던 뱀에게

물려 결국 죽었다고 한다.

 

 

 

 

처녀의 탑

 

지금은 레스토랑으로 사용되고 있는 이곳은

 내부에 박물관 같은 용도로 전시품도 있다고 한다.

배를 타고 가야 하는 곳이기 때문에

예약제로 이루어진다.

 

 

 

 

왼쪽을 보면 유럽 대륙이요,

오른쪽을 보면 아시아 대륙이다.

양 대륙을 한 눈에 담는 기분이 묘하다.

 

 

 

 

보스포루스 1 대교

 

우리의 남해대교처럼 현수교 형식으로 만들어진 

유라시아 대교(일명 보스포루스 대교)가 1973년 건설됨으로서

유럽과 아시아 두 대륙을 자동차로 왕래할 수 있게 되었다.

파티대교와 보스포루스 대교는 모양이 같아서

모양만으로 다리를 구분하기가 어렵다 한다.

 

 

 

 

암소가 건너간 다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가로지르는 다리는

 보스포루스 대교와 파티하 술탄 메흐메드 대교 두개가 있는데,

제3의 다리가 곧 건설될 예정이다.

해협 횡단의 유라시아 대교(일명 보스포루스 제1교)는

 세계 유수의 현수교로 영국과 독일의 자본으로

공화국 창건 50주년인 1973년 개통된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국제간선도로이다.

두 번째 다리는 일본의 지원으로 1988년에 완성되었는데

 제2의 보스포루스대교 혹은 파티하 술탄 메흐메드교라 불린다.

1453년에 비잔틴을 정복했던 메흐메드 2세의 이름이

  다리에 붙여진 것이다.

 

 

 

 

보스포루스 해협에는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자동차 전용 다리가 2개뿐이라

러시 아워때는 차량 이동이 불편하기 때문에

두 지역을 통근하는 이스탄불 시민들은

주로 연락선(바푸르)을 이용한다.

 

 

 

 

유럽(트라키아)과 아시아(아나톨리아)를 연결하는

 1510m의 보스포루스 대교,

터키 공화국 수립 50주년인 1973년에 개통되었다.

다리를 거슬러 올라 가면 흑해가 나온다.

 

 

 

 

 

아시아쪽 이스탄불은 멀어지고

유럽쪽 이스탄불 신 시가지쪽 가까워진다.

 

 

 

 

 

 

 

 

천년고도 이스탄불의

앞을 지키고 있는 이 아름다운 바다가

바로 마르마라해이다.

이 바다는 북동쪽으로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거쳐 흑해로 통하고,

 남서쪽으로는 차낙칼레 해협을 거쳐 에게해로 통한다.

바다 속까지 훤히 드러나 보이는 청정함,

옅은 푸른색 물감을 풀어놓은 것만 같은

아름다움을 가진 바다로 유명하다.

 

 

 

 

 이 마르마라 해를 역사의 바다라고 하는데

이는 1차세계대전때 독일 편에 선 터키가

 영국의 처칠을 상대로 국부 케말 파샤 아타튀르크가

조국을 지켜낸 차낙칼레 전투도,

정복자 술탄 메흐메드 2세

 천년제국 로마의 숨통을 끊은 콘스탄티노플 전투

모두 이 역사의 바다,

마르마라 해에서 있었던 일이기 때문이다.

 

 

 

 

 

 

다시 갈라타 다리가 보인다.

 

 

 

 

 

 

예니 자미

 

 

 

 

이스탄불 구 시가지쪽

 

 

 

 

쉴레이마니예 자미

 

이스탄불에서 두 번째로 큰 이슬람 사원으로

골든 혼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서 있다.

터키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미 중 하나로 손꼽히며

 직경 26.5m, 높이 53m에 달하는 돔과

첨탑(미나레) 4개, 발코니 10개로 구성되어 있다.

자미는 당대 최고의 건축가였던 미마르 시난의 주도로

1550년부터 7년에 걸쳐 완공되었다.

 이곳 정원에 나란히 위치한 술레이만 1세와

그의 부인 록세라나(하세키 휴렘)의 영묘도 시난의 작품이다.

터키의 많은 건축물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훼손되거나

지진 피해를 입어 파괴되었으나,

 미마르 시난이 설계한 이곳은 균열조차 생기지 않을 정도로

견고하게 지어졌다.

 

 

 

 

오른쪽 베야짓 탑

 

 

 

 

 

 

예니 자미의 부속 시장이었던

구시가지의 이집션 바자르 (향료 시장)가

예니 자미와 갈라타 다리 주위로 형성되어 있다.

 

 

 

 

 

 

 

뉴 브릿지

 

 

 

 

 

2013년 완공된 뉴 브릿지

 

 

 

 

 

 앞에 다리 아타튀르크 다리

 

 

 

 

아타튀르크 다리와 뉴 브릿지가 겹쳐 보인다.

 

 

 

 

 

공항 갈 시간이 다 되어가자

날씨가 좋아졌다.

 

 

 

 

유람선 위에서 유럽과 아시아 양 대륙을

 동시에 눈에 담으며 50분의 유람선 투어를 했다.

 

 

 

 

AD 476년,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뒤

서양 기독교 문명의 방파제 노릇을 해 온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1453년 오스만투르크에 의해 함락되었다.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동로마제국이 멸망하기까지는

단 53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것도 스물한 살 약관의 한 사내에 의해 허망하게 무너져버린 것이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제7대 술탄이었던 메흐메드 2세는

이전의 술탄들이 이루지 못했던

 콘스탄티노플 공략에 도전하여 성공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오스만투르크의 시대를 열었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은 비록 쇠퇴하긴 했지만

난공불락으로 알려진 견고한 요새를 구축하고 있었다.

총 길이 21km에 달하는 삼중 성벽은

웬만한 포격에도 끄떡하지 않을 정도로 견고했다.

역대 투르크왕조의 술탄들 역시 콘스탄티노플의

높고 견고한 성벽과 수비에 밀려 매번 물러나야했다.

 청년 술탄 메흐메드 2세는 비잔틴제국의 해상봉쇄를 뚫기 위해

언덕에 레일을 깔고 배 72척을 끌어올려

골든 혼으로 진입시켜 비잔틴을 제압한 전략이 성공했다.

말 그대로 배가 산으로 간다.라는 수사를 현실로 바꾸어 놓았다.

1,400년간 지속되던 로마제국이

보스포루스 해역의 전투에서 오스만의 술탄 메흐메드 2세에 의해

비잔틴 제국의 종말을 고하게 한 전투다.

 

 

 

 

왼쪽 갈라타 타워

 

 터키이스탄불 갈라타 지역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타워의 전망대에서는 유럽과 아시아를 가르는 해협인

보스포루스 해협과 골든혼 그리고 이스탄불 시내 전체를 볼 수 있다.

 원래 있었던 타워는 제4차 십자군 전쟁 때 파괴되었고,

 1348년에 제노아 자치령에 의해

타워 오브 크라이스트 (그리스도의 탑)라는 이름으로 재건축 되었다.

또한 타워는 오토만 시대에 여러 번 재건축 되었고

 화재 및 적의 침입을 관찰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1960년에는 목재로 된 내부를 콘크리트로 바꾸고

 일반인들이 관람할 수 있도록 공개했다.

 

 

 

 

 

갈라타 타워

 

타워의 높이는 62.59m이며 꼭대기의 장식물까지 포함하면 66.90m이다.

이것이 건축될 당시에는 그 도시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다.

이 타워는 비잔틴인들에게는

큰 탑이라는 뜻의 메가로스 피르고스로 불리워졌고,

후에 오스만 투르크 제국 시대인 1638년에

 헤자르펜 아흐멧 첼레비라는 사람이 자신이 만든 날개를 달고

 이 타워의 꼭대기에서 보스포루스 해협을 지나

아시아 쪽인 우스크다르 언덕까지 날아가는 신기록을 세워서,

 일반인들에게는 그의 이름을 딴 헤자르펜 타워라고 불리기도 한다.

 

 

 

 

갈라타 타워 야경

 

 

 

 

 

여행사 홈피에서

 

 

 

 

 

 

이제 유람선에서 내려

 

 

 

 

버스를 타기 위해 가고 있다.

 

 

 

 

아타튀르크 공항으로 출발했다.

 

 

 

 

이스탄불이여 안녕~~~

 

 

 

 

 

 

곧 하차 할

현지 가이드 알리씨가 작별 인사를 한다.

모두 정이 들은 그를 위해 진심으로

수고했다고 박수를 쳤다.

 

 

 

 

발렌스 수도교

 

 비잔틴 시대에 완공된 발렌스 수도교가

원형 그대로 남아 이스탄불의 한가운데를 통과하고 있다.

고대 로마인들이 건설한 수도교는

 발전, 관개, 수도 등의 용수로나

 운하 등을 통하게 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교량이다.

 

 

 

 

발렌스 수도교를 뒤로하고

버스는 공항을 향해 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