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돌담길, 광화문광장
2016.10.22 토 ~ 2016년 10.23 일 서울여행 둘째 날 홍대거리에서 점심과 커피를 마시고 덕수궁 돌담길을 걷기 위해 덕수궁으로 왔다.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비가 오는데도 공연이 열리고 있었다.
비를 맞으면서
열정적으로 춘다.
한참을 서서 구경했다.
대한문
원래 정전인 덕수궁 중화전의 정면에 있던 것을
나중에 동쪽으로 옮긴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우진각지붕집으로
겹처마에 단청을 하였으며 각마루에 양성을 하고
취두, 용두, 잡상을 얹었다.
현판은 당시의 궁전대신 남정철이 썼다.
대한문
1897년 광무1년 고종이 명례궁을
옛이름인 경운궁으로 다시 부르게 하고
1906년 4월에 그 정문인 대안문을 수리하면서
문의 명칭도 대한문으로 고쳤다.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
덕수궁
원래의 이름은 경운궁인데
고종황제가 1907년
황위를 순종황제에게 양위한 이후
이곳에서 계속 머물게 되면서
고종황제의 장수를 빈다는 뜻의
덕수궁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고종이 아관파천 이후 환궁한 곳도 덕수궁이다.
덕수궁은 대한제국의 정치사적 무대이자
새로운 도시의 중심이었으며 불행한 역사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현장이다.
덕수궁 사적 제124호
조선 시대 5대 궁궐중 하나인
덕수궁은 궁궐 가운데 가장 규모가 작으며,
개인 저택을 궁궐로 개축하였기 때문에
전각 배치도 정연하지 못하다.
그리고 석조전과 정관헌 등
서양식 건물이 들어서 있어서
고유한 궁궐의 양식과는 다른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덕수궁 사적 제124호
조선 초기 세조가 남편을 잃고 궁궐을 떠나는
맏며느리 수빈 한씨(인수대비)를 가엽게 여겨
개인 사저로 마련해주었고,
이후 한씨의 차남 자산군(성종)이 보위에 오르게 되어
궁궐에 들어가자 장남인 월산대군이 물려받았다.
임진왜란 뒤 선조가 월산대군의 집을
임시로 왕의 거처로 쓰면서 궁이 되었다.
1608년 선조가 죽은 뒤 광해군이 이곳에서 즉위하였는데,
그해 완성된 창덕궁으로 떠나면서 경운궁이라는 궁호를 붙여주었다.
그후 선조의 왕비인 인목대비가 경운궁으로 쫓겨나면서
광해군은 이 곳을 서궁으로 낮추어 부르게 하였다.
1623년에 인조가 이곳에서 즉위하였으며,
고종이 황제로 즉위한 뒤에는 정궁이 되었다.
1897년(고종 34) 고종이 아관파천 후 이 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비로소 궁궐다운 전각들을 갖추게 되었다.
1904년 큰 화재로 전각 대부분이 소실되었으나,
1905년 즉조당,·석어당,경효전,함녕전 등이 중건되었다.
1906년 대안문이 수리된 뒤 대한문으로 개칭하고 정문으로 삼았다.
1907년(순종 1) 순종 즉위 후 궁호가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변경되었다.
대한문 옆 덕수궁 돌담길 시작
일제가 경운궁을 훼손하는 과정에서
오늘과 같은 길이 형성이 되었는데,
경운궁의 70%를 분할 매각하여
궁 영역을 대폭 축소하고,
그 중간에 길을 내고 담을 쌓은 것이
오늘날 덕수궁 돌담길이 되었다.
정동길 (덕수궁 길)
정동길이라고도 불리는 덕수궁 돌담길은
대한민국의 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곳 중 하나다.
수많은 노래에 등장하기도 한 돌담길은
1차로 일방통행으로
자동차보다 사람을 배려해 여유롭게 걸을 수 있다.
또한 인근에는 서울시립미술관, 정동극장을 비롯한
문화시설과 고궁이 위치해
외국인 관광객에게도 인기 많은 거리이다.
가로수가 이쁜 손뜨개 옷을 입고 있다.
덕수궁 길
1999년 서울시가 덕수궁 길을
걷고 싶은 거리 1호로 지정하였다.
덕수궁 길은
2006년 건설교통부에서 주관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낙엽 쌓인 덕수궁 돌담길
봄에는 새싹이,
여름에는 매미가 우는 그늘 길이,
가을이면 낙엽이 흩어진 길이
겨울이면 하얗게 눈 내린 길이,
사계의 아름다움이 있다는 덕수궁 길
이쁜 가로수 스웨터
장독대를 소재로 한 작품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 정동교회가 보인다.
개신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1882년이다.
1884년에 서상윤이 서양인 목사와 만주에서 간행한
누가복음서와 요한복음서를 몰래 가지고 들어와
황해도 송천에서 복음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개신교의 출발점이다.
1885년에 미국인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와
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목사가
인천항을 통해 입국하였다.
그들은 기독교 전파와 교육사업을 목표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큰 족적을 남긴 사람들로,
그들의 활동 무대가 바로 정동 일대였다.
정동교회 사적 제256호
정동교회는 이 땅에 처음 세워진 교회당(감리교)이면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빅토리아식 예배당이다.
1895년 9월에 착공, 이듬해 헌당식을 거행하고
1897년 10월 무렵에 준공된 고딕풍의 붉은 벽돌 건축물이다.
교회 내부는 평천장에 별다른 장식 없이 간결하고 소박하며
기단은 석조이고 남쪽 모퉁이에 종탑을 세웠다.
건물은 아치 모양의 창문을 낸 고딕 양식의 교회당이다.
1926년 양쪽 모퉁이를 넓혀 삼랑식 평면형으로 교회 건물을 증축하였으며
1953년에는 6·25전쟁으로 반파된 교회를 수리하여 복원하였다.
1918년 한국 최초의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된 정동교회 내부
정동교회의 역사는 1885년 10월 11일,
미국 북감리교 선교부 목사 아펜젤러가
정동에 마련한 한옥집에 예배실을 설치하고
감리교회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인을 위한 성례식을
가짐으로써 시작되었는데,
이 날 여자 한 사람을 포함한 4명의 신자가
예배를 드리고 세례를 받았다.
아펜젤러는 이보다 앞서 1885년 6월에 입국하였으나,
당시 조선 정부로부터 그리스도교의 전도사업이
공식적으로 승인되지 않아 배재학당을 세워
신학문 교육부터 시작하였다.
1887년에는 정동에 준공된 건물을
벧엘예배당이라 칭하고 첫 공개예배를 가졌으며,
같은해 한국 최초 여성과 어린이 전용병원인
정동부인병원을 개원했다.
정동제일교회에서는
많은 독립운동가들을 배출했다.
3.1 운동시 민족대표 33인으로
이필두 목사와 박동완 전도사가 참여했다.
3·1 운동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어 옥사한
이화학당 학생 유관순 열사도 정동교회 신자였다.
한국의 개화운동을 이끌었던 윤치호와
대한민국 건국대통령 이승만도 정동교회의 장로였다.
서재필이 정동교회청년회를 중심으로 협성회를 조직하여
독립협회의 전위대를 만들 때
노병선, 신흥우 등과 함께 주도하였다.
정동길은
사대문 안쪽에 위치한 덕에 조선시대에는
왕실과 양반들의 주거공간이던 곳이다.
백 년이 넘은 건물들과 아름다운 가로수,
근현대식 건물이 가득한 역사의 거리이다.
대한제국시절 영국영사관, 미국대사관,
러시아 공사관 등이 있으며
정동교회를 비롯하여
이화학당, 배재학당 등이 자리하고 있다.
덕수궁 남쪽에서 서쪽으로
이어진 돌담길
덕수궁 남쪽에서 서쪽으로 이어진
담장을 따라가면서
미국대사관저, 구세군 중앙회, 서울시청별관,
덕수초등학교 등이 위치해 있다.
미국 대사관저
덕수궁 후문
후문에서 바라 본 덕수궁 석조전
덕수궁 돌담
덕수궁 돌담 맞은 편 돌담
구세군 중앙회
덕수궁 돌담 길을 벗어났다.
광화문 광장으로
광화문 광장
광화문 광장은 광화문에서
세종로 사거리및 청계광장에 이르는 세종로의 중앙에 설치된
폭 34미터, 길이 740미터의 상시광장및
평상시엔 차도이나 대규모 행사시 광장으로 활용 가능한
앙복 10차선의 예비광장으로 이루어진 광장이다.
2009년 8월 1일 12시 일반 시민에게 개방했다.
저 멀리 광화문이 보인다.
2009년 8월 1일, 새로운 모습으로 단장하여
시민들에게 개방된 광화문 광장은
600년 역사를 지닌 서울의 중심거리 세종로를
차량 중심의 거리에서 인간 중심의 공간으로 전환하고,
경복궁과 북악산 등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조망할 수 있는 공간으로 새롭게 조성하여,
세종로의 옛 모습인 육조거리 복원을 통한
역사·문화 체험 공간으로 재탄생되었다.
퍼 온 광화문 사진
광화문 광장의 이순신장군 동상
비보이들의 공연
광화문 광장의 세종대왕 동상
[참고: 두산백과, 위키백과, 네이버캐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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